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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한 삶

여호수아 1:7-8
이승남 선교사

(영생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만사형통이라는 말은 모든 일이 뜻한 바대로 문제없이 잘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 자녀들, 직장 등에서 큰 문제, 어려움, 고난 없이 평안하게 뜻한 바를 이루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형통이라는 말을 이런 뜻으로 주로 사용합니다. 성경에서도 형통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보통 형통한 삶을 말하면 요셉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 1:7-8)

위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면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실 형통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형통이었을까요? 우리가 여호수아의 삶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의 삶은 세상이 말하는 형통의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분명히 애굽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오랜 기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고 부르짖었다고 나옵니다. 또한 출애굽 하기 전에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고강도의 노동을 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한 후에 광야에서 약 40년의 시간을 보냅니다. 이 광야 생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라리 고된 노동을 하던 애굽이 더 좋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광야 시절에 장정만 60만인 출애굽 1세대가 다 죽습니다. 여호수아의 가족, 친척, 그리고 친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자신이 평생 믿고 따랐던 위대한 선지자 모세도 죽었습니다.

그 후에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합니다. 여러 지역을 옮겨 가며 수십 명의 왕들과 전쟁을 합니다. 이 치열한 전쟁을 여호수아는 약 7년 동안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통 정말 바쁘고 고단한 하루를 살았을 때 오늘 정말 전쟁 같은 하루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는 실제 전쟁을 약 7년 동안 하고 살았습니다. 아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잘 때가 많을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하고 정착하는 과정을 지휘하고 도와주는 것을 약 18년 동안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겠습니까? 여호수아는 이 과정이 다 끝나고 마지막에 산간 지방의 초라한 땅을 취합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 생애를 요약하면 노예 생활, 광야 생활, 정복 전쟁, 땅의 분배와 정착입니다. 여호수아가 정말 세상이 말하는 형통을 누리며 살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과 어려움과 문제가 많았던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의 인생을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형통은 세상이 말하는 형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려고 했던 형통은 무엇일까요? 여호수아서 1장 7절과 8절에 “형통”이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지금 여호수아서에 사용된 형통이라는 단어는 세상이 말하는 형통의 뜻과는 다릅니다. 이 형통은 고난과 문제와 어려움이 없이 잘 풀리는 삶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온 형통이라는 단어의 원어와 여호수아서의 문맥을 생각해 보면 “어떤 일에 성공하다” 혹은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통이라는 단어를 해석하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이라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성취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봐야 될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뜻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까? 물론 그들도 뜻과 의지가 있었지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형통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형통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의 순종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통한 삶은 무엇인가요? 아무런 고난과 어려움과 문제가 없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삶 가운데 고난과 어려움과 문제가 있을지라도, 고된 노동으로 힘들고, 광야 같은 생활 가운데 있으며, 전쟁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너무 많은 일에 짓눌려서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날마다 그리고 순간마다 우리를 향해 주시는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목도하며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형통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시는데 통로로, 도구로 쓰임 받는 삶입니다.

이러한 여호수아서의 관점에서 형통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형통한 삶을 사셨을까요? 사 52:13절 보시면 내 종 곧 고난의 종이 형통한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내 종(고난의 종)은 예수님이 십니다. 예수님이 형통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형통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았던 여호수아 1:7 절과 8절에 나오는 형통과 원어로 보면 인칭만 다른 똑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서 나온 예수님의 형통은 여호수아에서 나온 형통과 일맥상통한 뜻인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 혹은 사명을 성공적으로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떤 사명을 성공적으로 성취한다는 것일까요? 사 53:1-6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명은 바로 십자가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십자가의 사명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온갖 수치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찔림 당하시고 상함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셔서 살과 가죽이 찢기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어깨에 지시고 마침내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자신을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바치셨습니다. 옆구리에 창이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이 땅 가운데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기까지 순종하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형통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형통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순종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믿음으로 감당하며 인내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어 가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고난이 때로는 너무 무겁고 우리는 연약해서 넘어질지라도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는 믿음의 고백과 자세로 살아가는 삶,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이 바로 형통의 삶입니다. 여러분 바로 십자가가 형통입니다. 이러한 형통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leesn80@gmail.com

09.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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