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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꽃 피우는 사람

사도행전 8:1-8
류인현 목사

(뉴프론티어교회)

지난 코스타를 통해서 함민복 시인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시를 알게 됐습니다. 함민복 시인은 한 주인이자기 집 담장에 화분을 쭉 놓아둔 걸 보고는 인싸이트를 얻은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이 집의 담장을 넘으려고 시도한다면 화분이 걸림돌이 되겠지요. 보통은 쇠창살이나 깨어진 병들을 담장 위에 설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집주인은 화분을 놓아둔 거죠. 아마 미관상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밤손님이 그 담장을 넘으려고 한다면 그 화분을 건드려서 떨어뜨릴 확률이 높고 화분이 떨어져서 깨지는 소리에 주인은 자기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걸 알게 되겠죠. 주인은 미관과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한 것 같은데요. 시인은 모든 일, 모든 것에 선 긋기를 좋아하고 경계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경계의 그 자리를 허물자 거나 없애자고 직접적, 강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조용한 시로 세상 앞에 강렬한 도전을 주는 걸 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빌립이 바로 경계에서 꽃을 피운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이 선을 긋고 경계를 그어 놓은 사마리아 땅 그 경계에서 꽃을 피운 그리스도인 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원수 관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은 역사적인 골이 깊어 쉽게 풀릴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인종적 편견과 감정적 대립이라는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수하고 성령을 받게 한 것은 복음으로 모든 차별의 벽을 허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에서의 인종차별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BLM이나 Asian Hate Crime 같은 걸로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너무 안타까운 현실이죠. 우리 사랑하는 조국 한국도 사실 예외는 아니지요. 수백만의 다문화 가정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심한 인종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국경의 경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경계가 있는 거죠. 아니 사람의 마음 안에 장벽이 세워져 있는 것이죠. 몇 해 전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에 시소가 놓이고 양 나라 어린이들이 그 시소에서 함께 노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지요.

주 예수의 복음은 주인과 종의 경계, 남자와 여자의경계를 허물고, 성전에 있는 이방인의 뜰의 담장을 허물고, 지성소와 성소를 경계 짓는 휘장을 찢어 버렸고, 유대인과 헬라인의 경계, 인종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과 통일되고 서로 간 하나로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고 서로가 하나 되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늘을 거부하며 땅에 쌓아 올린 담장을 허물고 그 경계선에 피어난 아름다운 생명의 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환영받는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죠.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경계는 허물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위대함입니다.

이 땅에 선을 넘어오신 예수님의 사랑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유대 땅의 경계를 넘습니다. 혈루증 걸린 부정한 여인이 자신을 만지도록 그 여인이 경계를 넘도록 옷자락을 내어 주었습니다. 쿼런틴을 해야 하는 나병환자들이 쿼런틴에서 벗어나 경계를 넘어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것을 예수님은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최고의 사회적 강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사회적 약자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스스로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셨죠. 사랑은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거란 걸.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걸. 사랑은 선을 넘는 거란 걸.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는 원래 경계란 없었습니다. 국경이라고 하는 건 사실상 인간이 그저 지도에 그어 놓은 보이지 않는 선일뿐인 것이죠. 하나님 나라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모두가 한 나라요 한 가족입니다. 담장이 없고 경계가 없죠. 천국은 모든 곳에서 꽃이 피어나는 곳입니다.

빌립은 원수 된 사마리아인들을 편견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며 복음을 외치는 그 은혜의 복음을 듣고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 도시 안에 큰 기쁨이 넘치며 복음으로 인해 축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 하나님나라, 천국이 임한 것이죠. 

여러분이 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으로 고국을 떠나 여기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은 왜 힘든 유학생활과 이민생활을 통과하며 가정을 꾸리게 하시고 자녀를 낳고 이민자로 살아가게 하실까요? 단지 좋은 직장 취직하고 남 부럽지 않게 잘 살아가기만 하면 그만일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디아스포라였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인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니엘, 에스더처럼 여러분을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다 알지 못하는 큰 그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여러분의 삶을 산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삶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시죠.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우리 교회를 통해 주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오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경계를 넘어서도록 우리를 흩으시고 보내시고 때로는 고난과 핍박의 상황을 맞닥뜨리게도 인도하시죠. 빌립이 사마리아로 선교를 떠나게 된 것은 동료 집사인 스데반 집사의 순교 때문에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어서 이지 않습니까?

2001년 9월11일 기억하시죠? 맨해튼 다운타운에 있었던 월드트레이드센터가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해 무너진 뉴욕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사건입니다. 이 큰 사건 이후에 뉴욕 시민들은 주일에 예배당을 더 찾게 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큰 핍박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산 자들에게 가장 큰 외침이 됩니다. 죽음은 산 자들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스데반의 죽음, 첫 순교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삶에 대해서 진지한 물음을 던졌고 그들에게 복음에 헌신하는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인도했을 것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맞는 말임을 알면서도 사람은 아픔과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죽기보다 싫어하죠. 삶에 대한 집착, 행복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저는 이 본성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래 인간은 행복한 삶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인간에 있다고 고백한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기를 그 누구보다 더 원하십니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떠나면서 부터 하나님없이 살 수 있을 것처럼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살아가면서부터 인류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형이 동생을 죽이는 큰 일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악의 모습들이 넘치게 되었죠. 고통, 재난, 핍박, 악은 이 땅의 엄연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누구도 이 현실을 피하거나 외면한 채 살아갈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온 인류는 같은 운명 아래 놓이게 된 것이죠.

결국, 이 땅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재난과 핍박에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온전히 알게되기 전까지 우리는 내 삶과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서 벌어지는 큰 일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뜻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죠. 중요한 것은 고난과 핍박의 크기가 아니라 그 고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고 확산되는 복음의 불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고난과 재난과 악과 고통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시면서 결국 복음을 땅끝까지 증거하시기를 원하시고,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복음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유대교의 핍박이라고 하는 것을 당신의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부흥을 약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복음의 열정을 태우는 불쏘시개가 되었습니다. 그 형벌로 죽은 자를 위해 우는 것은 산헤드린 공회의 판결을 불복하는 것이었는데,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스데반을 장사하면서 크게 울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에 교회를 향한 핍박이 더욱 거세어지면서 성도들은 모두 흩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오히려 복음의 확산이라는 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복음은 항상 좋은 환경 속에서 꽃 핀 것이 아니라 척박하고 어려운 곳에서 강한 생명력으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번 팬데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팬데믹 이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약화시켰다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은 오히려 복음을 더 강화시켰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확인하게 하셨고, 팬데믹 동안에 드러난 각종 사회 문제들이 오직 복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라는 확신을 더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떨어져 떠난 사람들도 많이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이 약화된 것은 아니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처럼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교회에 계속해서 비신자들이 찾아오고 회심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능력, 복음이 계속해서 교회를 통해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경계를 끊임없이 허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그 경계에 서서 꽃을 피우는 복음의 프론티어가 되십시오. 미국 땅에 한인 디아스포라라는 경계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그 경계선 상에서, 소수로 살아가는 이민자의 경계에서 내 능력과 힘으로 그들을 짓눌러 이기는 것이 아닌 그 자리에 꽃을 피워내는 용서와 사랑과 환대로 그들을 품고 섬기는 주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 이 땅의 모든 담장마다 꽃을 피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inhyun.ryu@nfcnyc.org

08.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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