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장로교회)
고대 그리스에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육상선수가 죽을 고생 끝에 2등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군중은 우승자에게만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승자를 위한 축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를 비롯한 다른 선수들은 들러리를 서야 했는데, 그가 집에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승자의 이름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시내 한복판에 우승자를 기리는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이제 2등을 한 그는 하루하루 그 동상을 보며 자신이 패자임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시기와 질투가 그의 영혼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국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잠을 못자고, 몰래 밖으로 나가 승자의 동상이 세워진 맨 아랫부분을, 기초부터 조금씩 끌로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가 여느 때와 같이 석상을 파낼 때, 그만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육중한 우승자의 동상이 큰소리를 내고 쓰러지며 그 사람을 덮쳤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그를 죽였을까요? 포시스는, “고장난 세상이 말썽이 아니라, 그 안에 난파당한 영혼이 말썽이다”라고 했는데, 세상이 그를 죽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동상이 무너진 순간에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조금씩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었던 것이죠? 하루하루 생각이 꼬리를 물때마다, 그를 죽인 것은 결국 질투의 무게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영혼의 치명적인 독이 되어 그를 죽였던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못 지켜도, 마음만은 지켜야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얻은 명예를 잃는다고, 물질을 잃는다고, 관계가 끊어진다고 생명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잃고, 내 삶을 잃고, 내가 피땀 흘려 일구어 놓은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과 영혼을 지키기 위해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17:14)
먼저, 그는 그의 모든 기도의 근거로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라는 고백을 하는데, ‘주님이 나의 찬송’이란 말에서 ‘주님’과 ‘나’라는 표현은 서로 간의 친밀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통 중에도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리게 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기도가 확신에 차 있으면서, 이미 그의 영혼이 회복되었다는 것도 알아챌 수 있는데, 이처럼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과 영혼을 지키고자 한다면 늘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불안하다면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친밀하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같이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좋아하는 일들도 같이 하고, 또 어려움이나 고충이 있을 때 함께 나누는 일과 같은 일들을 하죠? 그렇게 삶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주님과 함께 삶을 나누고 있는가? 주일날 교회 나와 예배드릴 때나,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과 친밀하려하면 안 되는 것이죠?
찬송가 394장은,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라고 찬양하는데, 우리는 진정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우리의 참된 친구는 오직 예수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는 주님과 함께하기보다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언제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친했어도, 잘해줘도,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에 따른 삶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말씀에는 조건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내게 와야 한다는 것이라 하겠죠? 그러나 그것도 그냥 주님께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조건 주님이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먼저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의 찬송이신지라’고 고백하는데, 그것은 그가 주님과 가까이 하며 동행하고 있었기에 드릴 수 있었던, 참된 신앙고백이었죠? 우리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진정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이와 같은 참된 신앙의 고백을 찬양하며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러할 때, 그는 또한 하나님께 ‘나를 고치소서’라고 부르짖는데, 그것은 그가 이미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이에 그는 부르짖음을 통해 그의 상처 받은 영혼의 문제를 해결 받길 원했는데, 가능할까요? 그러나 시편 34편 18절은 말씀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사람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길 꺼려하고 피할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은 결코 외면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 9절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했습니다. ‘사모하는’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솨카크’로, 맹수같이 뛰어다니고 찾아 헤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영혼의 만족을 위해 간절함과 갈급함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찾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때 하나님은 그의 영혼에 만족을 주시며 좋은 것을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렵고 힘들 때는 종종 시편 42편 5절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왜 낙심하느냐? 왜 불안해하느냐? 내가 있지 않냐? 내게 소망을 두라!’ 그러면 더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오직 그 길 밖에는 살 길이 없음을 믿고 부르짖습니다. 제가 처음 저희 교회에 부임해서도 몇 년 동안은 매일 새벽마다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부르짖음이 제 영혼에 힘을 주고, 기도의 응답을 가져왔음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렇게 부흥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영혼이 힘을 얻으며, 기도가 응답될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는 또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고 부르짖는데, 앞서 살펴보았던 ‘고치소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치료의 의미를 지닌 ‘라파’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내면의 치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원하소서’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솨으’라는 단어로, 외적인 회복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는 ‘고치소서 구원하소서’라는 두 가지의 기도를 통해 ‘내면의 불완전함과 외적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탄원하며, ‘완전한 자아의 회복’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우리를 내면의 고통과 외적인 고난에서 고치시고 구원해 주실 이가 있을까? 하나님밖에는 없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이죠? 예레미야의 간구는 오직 주님만이 나를 고치실 수 있고, 주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으니, 주님이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시편 18편 31절은,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도 고난 가운데 있다면, 오직 하나님밖에는 나의 구원자가 없음을 믿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상한 영혼을 고치시고, 우리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확실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으로 절박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주께만 소망을 두고 간구함으로 영혼의 문제와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과연 오늘 예레미야의 기도가 자신의 구원만을 위한 기도였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그는 민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지금도 자신뿐 아니라, 온 민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다면, 우리 자신만이 아닌, 우리 주변에 고통받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파하는 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 더욱 영혼이 강건케 되는 역사를 체험합니다. 복음전파의 현장은 영적 전쟁의 일선이기에 우리가 복음을 들고 나가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더 큰 영력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에 힘을 얻길 원하신다면, 복음을 들고 일어나 세상으로 담대히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력을 주실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카운티 Fire Marshall이 나와 교회를 폐쇄시키려고 주일예배 인원을 카운트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 예배를 드릴 수 없어서, 가운을 입은 채로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자 그들이 그냥 가버린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존심을 위해서는 강할 필요가 없지만, 하나님의 자존심을 위한다면 강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지만, 주님만 믿고 담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자존심을 위하여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기도는 펜데믹을 맞아 연약해진 우리 심령에 큰 힘을 불어넣을 만한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임하는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부르짖음으로 일어났던 예레미야와 같이 이 힘든 기간에도 늘 찬양과 기도로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늘 복음을 붙들고 담대히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더욱 강건케 됨을 체험할 줄 믿습니다. 팬데믹과 불경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강한 영혼으로 늘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명의 자리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여러분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syhan91@hotmail.com
08.0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