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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

시편 1:1-2
김동진 목사

(KAPC 개혁장로회신학대학원 학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1:1-2)

 

 오랜만에 오렌지카운티 방향 하이웨이를 지나면서 아름다운 수정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반가운 마음과 함께 지금은 타 종교에 소유권이 넘어갔다는 사실에 서글픈 마음도 들었습니다. 수정교회의 설립자였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그토록 강조했던 “번영의 신학”이 마치 알맹이를 상실한 쭉정이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국 교회도 7,80년대의 고도성장기와 함께 “번영의 신학”을 받아들여 복의 개념을 물질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큰 건물과 많은 예산이 복의 열매인 것처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세습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드러내자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연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은 무엇일까요? 시편 1편은 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먼저 알아 두어야 할 점은 “오만한 자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찜”이 “비방하는 자들”로 직역된다는 점입니다. 앞선 두 표현인 

“악인들의 꾀”와 “죄인들의 길”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죄를 의미하지만, 세 번째 표현인 “비방하는 자들(레찜)”은 구체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시편이 의미하는 복은 첫째,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한 가지 교훈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입을 가지고 이웃을 비방하는 데 사용하지 말고,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는 교훈입니다.

이와 똑같은 교훈을 보여주는 것이 신약의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입에 관한 교훈을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6).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이나 북한의 김정은이 눈만 뜨면 핵무기의 파괴력을 가지고 온 세상을 위협하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 모두는 한 영혼을 지옥 불에 던져 넣을 만큼의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혀입니다. 우리가 혀를 제어하지 않고 그 날카로운 칼날을 마음대로 휘두른다면 한 영혼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순식간에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9-10절). 그러므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약 4:11). 

입에 관한 야고보서의 교훈은 시편 1편의 교훈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나의 입으로 이웃을 비방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 읽기를 시작하다 보면 처음에는 의무적으로 시작하던 분들이 그 맛과 기쁨을 깨달은 후에는 프로그램이 끝나도 계속해서 읽어나갑니다.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 읽는 맛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성경 읽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시 119:148).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며 읽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비유적인 표현들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1):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 130:5-6). 이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바란다면 그것에 중독되었다는 표현도 가능해집니다. 약물에 중독된 자들이 그것을 공급받지 못하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금단 증세”라고 부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지 못할 때에 이와 유사한 증세를 보입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시 119:131).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약물에 중독된 자는 결국 그 몸과 영혼을 모두 잃게 되지만, 하나님 말씀에 중독된 자는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소개합니다. 2절에서 “묵상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까”는 “읊조리다”로 직역될 수 있는데, 이것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소리내어 읽으라는 것이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 성경에는 자음, 모음 뿐만 아니라, 단어마다 엑센트가 있으며, 심지어는 절 가운데에 쉼표가 있어서 잠시 쉬면서 숨을 쉬고 계속해서 소리 내어 읽도록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암기를 위하여 무엇을 읽을 때에 단순히 눈으로만 읽는 것과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은 그 효과가 다릅니다. 눈으로 읽는 것은 한 차례의 암기 효과밖에 기대할 수 없지만, 소리를 내어서 읽으면 우리의 눈, 입, 귀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시청각 효과와 더불어 암기 효과도 2-3배 증가하게 됩니다. 성경을 소리 내어 읽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유다 광야에 피신해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읇조렸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시 71:24).

이제 시편 1편의 교훈은 명백해집니다. 곧, 우리의 입을 가지고 이웃을 비방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라”는 것입니다. 복은 곧 우리의 입에 달려있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 모두는 수동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는데, 곧 나의 입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나의 입으로 계속해서 이웃을 비방한다면 시편 1편의 후반부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읊조린다면, 나의 삶은 철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며, 행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 열쇠는 우리의 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입을 채우고 읊조림으로써 주님과 동행함을 통해 복을 누리며, 행하는 모든 일에 항상 형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djkim3333@gmail.com

06.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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