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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봇을 막으려면

사무엘상 4장 16-22절
남일현 목사

든든한 교회

사무엘상 4장은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인해 언약궤를 빼앗기고 엘리 가문도 몰락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블레셋은 성경에는 그레데로 나오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인 크레타 섬으로부터 이주해서 가나안 서남부 지중해변에 자리 잡은 나라입니다. 그러한 블레셋은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서남부에서 동진을 하려다보니 이스라엘과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했는데 처음부터 4천명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 초반부부터 큰 어려움을 당한 겁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이가봇이 되었죠. 21절에 나오는 이가봇은 ‘영광이 어디에 있느냐?’는 뜻으로, 이스라엘에게 영광이 사라졌음을 알려줍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이가봇이 된 것이 아니라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이 잘못되었기에 이가봇이 된 겁니다. 우리도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 신자답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문제도 잘 해결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가봇을 막을 수 있는 방법들을 살피겠습니다.

 

1. 내 탓 깨닫고 회개하라

 

이가봇을 막으려면 첫 번째는 상황 탓과 사람 탓을 하지 말고 내 탓임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고 4천명이 죽었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전쟁에서 지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많이 했는데 성경은 그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현실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현실적인 이유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이스라엘이 보인 영적인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문제를 만날 때 바른 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길 원하셨죠.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론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 당연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패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영적으로 악한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항하여 싸울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왜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는지 자신들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철저히 회개한 후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했는데 그러한 원리를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이스라엘이 이러한 영적인 원리를 망각하지 않았더라면 이가봇은 막을 수도 있었겠죠. 이것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내 영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무조건 우리 편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해도 고난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의 뜻을 따르면서도 우리의 삶이 평탄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평탄이 아니라 우리를 더 죽이는 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상황 탓을 하고, 사람 탓을 하기 전에 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봐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영적인 회복부터 이루어야 우리가 이가봇을 막을 수 있음을 깨닫길 바랍니다.

 

2. 무당 신앙을 버리라

 

이가봇을 막으려면 두 번째로 무당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에게 패배하자 회개는 하지 않고 자신들 나름대로는 승리의 묘책이라고 생각하며 승부수를 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만 있으면 자신들이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 왔고 언약궤가 오자 백성들은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미리 샴페인을 터뜨렸죠.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영적인 상황에서 언약궤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뭐겠습니까?

내가 영적으로 바르게 살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 상징물만 있으면 무조건 복을 받습니까? 물론 언약궤를 보면서 백성들의 사기가 올라가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는 효과는 전혀 없었죠.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효과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3만 명이 죽었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언약궤 자체에서는 어떠한 능력도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효과가 발휘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부적처럼 가지고 다녀도 됩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는 샤머니즘적 신앙이 너무나 많기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미신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영적인 관계를 돈독하게 누리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물질이나 장소, 집회, 인물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마치 운동선수들의 징크스처럼 자신만의 신앙의 징크스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뭔가 신앙적인 액션을 취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나님을 찾습니다. 기도원을 찾아가고, 금식과 철야를 하고 목사를 찾습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그 다음에 또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풀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자신이 전에 효과를 받던 방법부터 챙깁니다.

그래서 전에 금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은 무조건 금식부터 하고, 작정기도를 했던 사람은 무조건 다시 작정을 합니다. 그런 방법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어그러진 관계를 풀어야 하는데, 어느새 하나님이 아니라 그런 방법 자체를 신뢰하고 붙들려고 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물론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금식을 하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미 습관이 된 패턴으로만 금식을 하면 그런 금식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신앙이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더 큰 패배를 안긴 하나의 언약궤 신앙, 즉 미신과 같은 무당 신앙이라는 겁니다.

내가 바른 신앙이 없으면서 붙들려고 하는 종교적 형식들이 있습니까? 그것이 금식이건, 어떤 집회나 특정 인물이건 그런 모든 것들은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 자체를 의지했던 것과 다를 것이 없는 무당 신앙입니다. 이러한 무당 신앙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자체나 특정 목회자 자체가, 십자가 자체가 부적이 되지 않도록 무당 신앙을 없애길 바랍니다.

 

3.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라

 

이가봇을 막으려면 세 번째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에게 언약궤는 승리의 보증수표였죠. 특히 여호수아서 6장에서 언약궤를 매고 돌면서 여리고를 점령했던 사건은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매고 여리고를 점령하기 직전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여호수아서 5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후 여리고를 점령하려고 대기할 때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셨죠.

사실 상황적으로 보면 적들이 눈앞에 있었기에 결코 할례를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그런 명령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언약궤를 매고 여리고 성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여리고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언약궤 자체 때문이 아니었는데, 본문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궤 자체를 의지했던 겁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인데,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빠뜨리고 알맹이가 빠진 종교적 형식, 미신적 신앙만 있었던 것이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가봇이 된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죽어도 좋다는 신앙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고 승리를 주실 겁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상황에서 드리는 모든 종교적 형식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음을 깨닫길 바랍니다.

물론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신앙을 무조건 욕할 수는 없습니다. 4절. 실로에서 전쟁이 벌어진 장소까지는 약 40킬로미터가 떨어져있었는데 그 거리를 언약궤를 매고 왔으니 그들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잘못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했는데,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에 있습니다. 내 개인의 문제해결이나 소원성취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지는 종교적 열심과 행동들은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 외에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4천명이 죽었을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결국 3만 명이 더 죽는 아픔을 당했고, 엘리 가문은 철저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19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명문 가문에서 아들이 태어나는 날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삼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21절처럼 그 아이의 이름은 이가봇이 되었습니다. 죽어가면서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으로 지어야 했던 어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 가문만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가 이가봇이 되었죠.

 

결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죄악을 따라 산다면 우리도 이가봇과 같은 결말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한 평생 교회 주변을 벗어나지 않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겠죠. 기독교적 장식물을 들고 다닐 수도 있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그저 이제까지의 종교적 형식의 패턴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과연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직 이스라엘 정도의 신앙 수준조차 없는 분들도 있고, 아직 미신적인 신앙,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신앙에 머물고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신앙들은 우리의 삶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길 바랍니다.

내게 지금 종교적 형식이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matthewinam@gmail.com

04.0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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