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삼는교회)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섰습니다. 출애굽한지 40년 만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고생 끝입니까? 사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서긴 했지만 아직 저들의 소유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앞에는 여전히 가나안 7족속과 함께 여리고 성이 떡 버티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여리고성은 전략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는 가나안 땅의 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마치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모든 문제가 끝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다면 좀 더 고려해 볼걸 그랬다고 하는 분들까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은 신앙생활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침공을 앞두고 길갈에서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출생한 남자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출생후 8일째 하라고 했기 때문에(레12:3) 그 율법대로라면 벌써 했어야 했는데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번 여리고 전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거룩한 전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것이 화근이 될까 해서 긴급하게 할례를 받게 했던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전쟁 직전에 군사들에게 할례를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혹시 적이 기습이라도 한다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도 그 정도 리스크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게 한 것은 이 전쟁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준비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셨다고 했다. (수6:2)“...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할 줄 믿습니다. 성도는 지금 눈앞에 거대하게 서 있는 여리고 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군사는 엿새 동안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 것이며, 제사장들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 행하되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양각 나팔을 불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양각 나팔 소리가 길게 울면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치라고 했습니다.
좀 무모해 보이지 않습니까? 성을 빙빙 돌기만 하면 여리고성이 무너진다니?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러 이런 황당한 계획을 세우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싸움은 너희가 아니라 내가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니 아무 일도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고 백성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방법이 이해하기 힘들어도 순종합시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성을 몇 번 돌았습니까? 13번을 돌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대적과의 싸움에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묵묵히 여리고 성을 돌고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조금 전에 요단강을 걸어서 건넜다. 그 기세로 바로 여리고로 쳐들어가면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여리고성을 7일 동안 13번이나 돌게 하셨습니다.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믿음과 순종인줄 믿습니다.
우리 삶에 기적이 없는 이유는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계산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사건은 우리 계산과 상식으로는 도무지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단순히 순종할 때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명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을 따라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말씀대로 일곱 명의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고 언약궤 앞에 나아갑니다. 백성들은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제사장들을 따라 돕니다.
여리고 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싸움을 앞둔 전사들이 아니라 마치 예배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 중심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 일곱 제사장이 양각나팔을 불며 나갑니다. 누가 보더라도 예배의 모습이죠.
성도의 삶의 승패는 예배에 달린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 우리 삶의 문제가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 싸움의 승부는 예배에서 결정이 납니다. 예배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제 6일 동안의 침묵이 지나고 마지막 날 제 칠일째가 되었습니다.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수 6:16). ‘주실 것이라’가 아니라 “이 성을 주셨느니라”라고 이미 이루어졌음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앞에 여리고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담대히 선포하세요,
그런데 수6:17을 보면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했습니다. 다 죽이라고 했는데 예외조항이 있습니다. 기생 라합과 식구들은 살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거역하는 자에게 심판이 되지만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구원과 축복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 저편에서 정탐꾼을 미리 보내 모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던 여리고 사람들은 곧 정탐꾼들을 의심하였고 그들을 추격하였습니다. 정탐꾼들은 꼼짝없이 붙잡힐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라합의 지혜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정탐꾼들은 장차 여호수아 일행이 들어 닥칠 때 라합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제안하였습니다. 그것은 가족들을 그 집에 모으고 그 집의 표식으로 붉은 줄을 늘어뜨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군에게 미리 알려 붉은 줄이 있는 집은 도움을 준 가정이니 살상하지 말라는 말을 해 놓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가 겉보기에는 모두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구별점입니까? ‘그리스도의 피. 붉은 줄이 있느냐’ 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붉은 줄의 의미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붉은 줄은 라합가정의 생명줄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이 생명줄임을 잊지 맙시다.
게다가 그 붉은 줄은 다름 아닌 정탐꾼들이 탈출하는데 사용했던 바로 그 줄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이 말할 때 ‘이 붉은 줄’(수2:18)이라고 명시한 것입니다. 그 붉은 줄은 정탐꾼을 살렸을 뿐 아니라 이제 라합을 살리는 줄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다시 말해 붉은 줄이 없으면 ‘그 피가 그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수2:19)라고 했습니다. 즉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그 죄 값을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앞에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질병이나 물질, 혹은 막힌 인간관계입니까? 문제의 해결방법이 무엇일까요? 예배를 통해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길 바랍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붉은 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구속의 은총을 잊지 말고, 생명줄임을 굳게 믿고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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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