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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굳게 붙잡아라!”

히브리서 4장 14절
이병은 목사

(한인삼일장로교회)

어렸을 때 시냇물을 건너고 위험한 산길이나 낭떠러지를 걸을 때 부모님들이 “내 손 꼭 잡아, 놓치면 큰일 나!” 하는 말을 들어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특히 차들이 많이 다니는 건널목을 건너고 또 사람들이 많은 시장을 갈 때면 언제나 “엄마 손 꼭 잡아!” 하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이런 말들은 부모들이 아직은 어려서 사고나 위험을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험에서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부모님들의 배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를 둔 자녀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감사하게도 오늘 본문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여기서 우리가 믿는 도리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 예수를 굳게 붙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권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기자가 이 명령을 히브리서에서 여러 번(히3:6, 히3:14, 히10:23) 반복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표현은 수도 없이 나옵니다. 

같은 표현을 저자가 한 책에서 여러 번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저자가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강조합니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살면서 붙들어야 할 것이 오직 영혼의 주인 되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강조하며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붙들고 살고 계십니까? 2022년 새로운 한 해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해서 너무나 큰 위험과 어려운 순간을 지나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붙들고 이 시기를 지나갈 수 있을까요?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에게 예수를 굳게 붙들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 1: 광야 길을 걷고 있기에 

 

그 이유는 신자들이 광야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권면할 때 이 권면이 아무런 배경 없이 불쑥 튀어나온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앞에서 진술한 내용을 배경으로 이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접속사는 앞에서 말한 내용을 전제하고 그래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에 그 이유를 알려면 그 앞에 나오는 3장과 4장을 살펴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비교적 길어서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신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의 종살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헤매는 저들처럼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신자들이 예수를 굳게 붙들어야 할 이유는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종일 햇볕이 내리쬐는 곳입니다.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서 겨울과 같이 추워지는 곳이 광야입니다. 마실 물이 없습니다. 불 뱀과 전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이 광야를 이렇게 물리적인 광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광야를 걷는 신자를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나그네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정체성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한국을 떠나 미국에 이민자로 살아가기에 나그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을 떠나지 않고 고향에 그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도 나그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향한 영적이고 신학적인 진단입니다. 이렇게 나그네요 순례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뒤따른 것은 수고와 고난입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이 아무리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긴 하지만 그에 따르는 수고와 고생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 수고와 고난이 신자들에게 예수를 굳게 잡지 못하고 오히려 놓아버리고 포기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시험과 맞닿아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려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수고가 불신으로, 이 고난이 종교 배반으로 연결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를 향하여 믿는 도리를 굳게 붙들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유 2: 예수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기에!

 

우리가 예수를 붙들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15절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주님이 아시고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또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마음이 차갑고 매정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마음이 따뜻하고 인정과 인간미가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다. 충분히 동정하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정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서로 동정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세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동정은 대부분은 속사정을 속속들이 모르고 표면적으로만 동정하는 것에 그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동정은 이것 이상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가 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정은 사람의 동정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체휼하실 수 있는 근거는 그도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세상을 사셨으며 그 사신 동안에 우리가 겪는 이 모든 아픔을 다 겪으셨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아픔 더 큰 고난을 경험해 보셨기 때문입니다. 

낮고 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배고픔은 기본이고, 냉대, 질시, 무시, 욕먹음,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시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충분히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유지나 라고 하는 작가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물어봐! 사연 없는 사람이 있나. 살펴봐! 고민 없는 사람이 있나. 가까이 다가가 봐! 삶의 무게가 없는 사람이 있나. 건드려 봐! 눈물 나지 않는 사람이 있나. 찾아봐! 힘들지 않은 사람 있나. 쭉 짜봐! 슬프지 않은 사람 있나. 털어봐! 아프지 않은 사람 있나.” 

팬데믹의 상황에 광야와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의 형편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꼭 붙들라.”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예수’ 아닌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있다면 명목상으로는 신자인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신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생활 하고 있다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서는 어떤 거룩한 일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많이 모인 교회를 통해서는 어떠한 당신의 뜻도 펼칠 수가 없습니다. 

2022년 새해에 오직 예수만 굳게 붙드시고 승리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hope2c@hotmail.com

0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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