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삼성교회)
요한복음 4장 13-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물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마르지 않는 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물, 생명을 주는 물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과 신앙이 성숙해져 간다는 것은 이런 생수로 표현된 물의 특성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자는 성숙한 사람을 물로 비유를 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물과 같다. 물이 좋은 까닭은 온갖 살아있는 것들에게 은혜를 끼치되 스스로는 싸우지 않을 뿐더러 모든 사람이 천하게 여기는 장소에 만족하여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온 세상이 물로 뒤덮이는 홍수의 때에 오히려 물 부족으로 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홍수로 인해 흙탕물이 되어버린 물은 물이되 생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물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물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생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흙탕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을 더 어지럽힐 뿐입니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 씨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외쳤는데, 이 외침은 이 시대에 희망을 주고 있는 사람, 생수와도 같은 사람이 없다는 가슴 아픈 절규가 아닐까요?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어둠과 죄악으로 인해 흙탕물처럼 혼탁해진 세상에 생수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혼탁한 세상을 맑게 하고 정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끊임없이 그 혼탁한 세상에 맑은 생수를 흘려보내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그 사명을 이어 받아 이 땅에서 생수와 같은 성도가 되어 이 세상을 정화시키고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물의 특성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서 우리들이 이 땅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맑은 생수와 같은 성도, 흐르는 물 같은 성도가 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첫째로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특성이 있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숙해진다는 것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낮아지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경륜이 쌓이고 직책이 올라 갈수록 점점 더 겸손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의 높이와 길이가 점점 높아져 갈수록 정비례하면서 인격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마태복음 18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당시 사람들이 인식하는 ‘크다’는 개념은 ‘높이’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높아지려하고 윗자리를 향해 무한 질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크다’의 개념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여 가르치신 것입니다. 즉, ‘깊이’와 ‘낮아짐’의 의미였습니다. 더 낮아져서 그 인격의 깊이를 더 깊이 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며,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낮아짐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큰 사람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로다." 바울이 노년에 자기를 돌아보면서 한 고백입니다. 나는 지극히 작은 자다. 부족한 사람이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이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더 이상은 흐를 곳이 없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물게 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런 그를 우리는 위대한 사도였다고 일컬으며 존경하는 동시에 성숙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시대에 이런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물은 좁은데서 넓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물은 한 방울 한 방울 모여서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고 마침내는 바다가 되어 흘러갑니다. 단순히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면서 점점 넓어집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하여 큰 바다를 이룹니다. 시냇물이나 우물물은 작은 돌멩이 하나만 떨어져도 요란을 떨고 파문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바다는 요동하지 않습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파문이 없습니다.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변화시켜 나갑니다. 넓이가 넉넉하여 그 모든 것들을 조용히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곽재구 씨의 ‘포구기행’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바다는 넓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쓰레기, 하수, 공장의 폐수, 썩은 물까지도. 동시에 바다는 창조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어루만지며 푸른 생명으로 고동치게 한다." 성숙한 사람은 마음이 넓은 사람입니다. 모든 일들을 가슴에 묻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창조를 해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런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약한 사람, 날카로운 사람, 시끄러운 사람, 흔들리는 사람들 모두를 마음에 품고서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부드럽게 만들고 성숙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대구영락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주일이면 전 교인이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부임해서 보니까 식사 후에 설거지를 하는데 늘 연세가 있으신 권사님들이 주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설거지를 도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배운 것이 있습니다. 큰 고무다랑이에 교인들이 식사할 때 사용한 식기와 수저 그리고 온갖 조리기구들이 다 담고 닦습니다. 그것을 닦으려고 고무다랑이에 손을 넣으면 때로는 포크에 찔리기도 하고 칼에 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날카롭게 날이 서서 찌르고 아프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씩 만져가며 오물을 닦아내고 맑은 물로 씻어내면 마침내 다시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과 기구들로 변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저는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바로 이 고무다랑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모든 것을 다 담아서 마침내 깨끗한 새 것으로 변화시키는 고무다랑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교회와 성도의 모형이 아닐까요? 원하기는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고무다랑이처럼 넓은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로 물은 모든 것을 감싸고 흐릅니다.
물의 세 번째 특성은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은 장애물을 만나면 깨버리거나 들어내거나 다투면서 흐르지 않습니다. 조용히 감싸고 흐릅니다. 어루만지면서 흐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흘러가는 흐름의 방향을 결코 바꾸지는 않습니다. 목표를 향해 나가면서 모든 것을 감싸 안고 흐릅니다. 치유하면서 흐릅니다.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흐릅니다.
산에서 풍화작용에 의해 돌이 깨지면서 날카로운 모습을 하고 냇가나 강에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물은 그런 돌들을 감싸고 흐르기 시작합니다. 일 년, 십 년, 수 천 년을 쉬지 않고 감싸면서 흐릅니다. 그러면 점점 그 돌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모양이 부드럽게 바뀌어 갑니다. 돌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문양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의 멋진 수석이 태어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뒤에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제자들이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떠날 뿐 아니라 그 중에 한 제자는 자신을 팔 것이라는 것까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발을 정성을 다해 씻어주시고 만져주셨습니다. 감싸주셨습니다. 부드럽게 품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부드럽게 감싸고 품어주심으로써 그렇게 모나고 날카롭기만 했던 제자들을 마침내 하나님나라의 일꾼으로 복음의 전파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란 다른 사람을 멋진 신앙인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모난 것은 다듬고 그 속에 있는 재능들은 발굴해가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성숙한 성도가 되실 뿐 아니라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양육되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자문에 보면 묵비사염(墨悲絲染)이란 말이 있습니다. ‘흰 실에 물이 들면 다시 희어지지 못함을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묵자는 공자가 사망한 다음해인 BC 480년경에 태어나 BC 390년경에 사망한 사람으로서 그가 생존하여 활동하던 시대는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 초기로 춘추전국시대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겪던 때였습니다. 때가 그렇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와 가치를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좇아 불의로 물들어 갔습니다. 이런 세태를 바라보며 묵자가 탄식한 말이 묵비사염(墨悲絲染)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노자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보내진 여러분들은 하나님나라의 흰 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흙탕물 같이 오염된 세상 한 가운데서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좇아 점점 혼탁해져갈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들 곁에서 도도하게 흰 빛을 지키고 살아가므로 이 세상이 얼마나 혼탁해져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생수이신 예수님을 닮아서 여러분들이 세상 속의 생수가 될 때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조금씩 맑아지고 깨끗해져갈 것입니다.
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한 해가 다 저물어가기 전에 나 자신을 살펴봐야겠습니다. 나는 생수이신 예수님을 얼마나 닮아 살았는지를 말입니다. 흙탕물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흐르는 생수가 되어 살았는지를 말입니다.
gsolee@hanmail.net
12.25.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