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교회 원로목사)
1906년 11월 16일 프랑스 아르데슈라는 지방에서 태어난 ‘앙리 샤르에르’라는 사람은 한 검사의 실수로 인해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람을 살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으로 ‘기니아’라고 하는 감옥에 수감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붙인 검사에 대한 복수심과 자유를 위해 탈옥을 수차례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고 거듭한 끝에 드디어 수감생활 10년 만에 탈옥에 성공합니다. 그는 1968년 자신의 체험담을 책으로 출간해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의 이야기는 ‘빠삐용’이란 제목으로 우리가 잘 아는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흥행에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 당시 평론가들에 의하면 그의 이야기가 책과 영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일으킨 이유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본능과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인간 의지의 승리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처벌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주인공에게 사람들은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와는 상반된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사방이 막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시고는 그곳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방주의 문을 손수 닫아버리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노아를 사방이 꽉 막힌 아주 제한적인 방주 속에 가둬 넣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홍수로부터 피난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7절).
그러면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신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의 죄악이 널리 퍼져 있었고 사람들의 생각이나 계획이 모두 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창6:5-7).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유독 노아 구하려고 하셨을까요?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창6:8).
그러니까 이런 맥락으로 보자면 우리가 지금 현재 살아가는 이 세상도 그 때처럼 사람의 죄악이 너무나 많이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죄악 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노아처럼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우리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라는 방주 속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는 방주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방주는 사방이 막혀있기 때문에 트여져 있는 바깥세상보다는 답답하다는 것이고 아울러 방주는 공간적인 제약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라는 방주 속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 맞춰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기준과는 다르게 거룩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답답하고 갑갑하고 불편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 좋은 대로, 자기들 원하는 대로 멋대로 살아가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이나 방법으로 살아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정당치 못한 방법을 이용하면 사업허가를 빨리 받을 수 있어도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방법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실한 공사지만 한번쯤 모르는 척하고 슬쩍 넘어가면 물질적으로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보다 제약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자유롭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 없어서 아주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방주 속에 갇혀서 살아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예수라는 방주 속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갑갑하고, 답답한 방주 속에 갇혀 살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창세기 8:13-19 봅니다.
(13)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14)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15)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16)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17)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19)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13절에 보니까 물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걷혔더니’ 14절에 보니까 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랐더라’, 그리고 19절에 보니까 방주에서? ‘나왔더라’
세상 사람들의 죄악이 온 세상에 퍼져있고, 그 사람들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들을 홍수로 다 쓸어버리셨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던 노아는 홍수가 난 후 377일이 지난 후에 갑갑하고 답답했던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물들었던 땅에 퍼부으셨던 죽음의 물을 ‘걷으신 후’에 그리고 ‘말리신 후’에 노아를 방주에서 ‘나오게’ 하시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우리들도 지금은 비록 예수라는 방주 속에 갇혀 살지만 물을 걷으시고, 땅을 마르게 하시고, 노아를 방주 속에서 나오게 하셔서 그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십니다.
비록 방주 속에 갇혀서 살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품을 수 있는 복과 소망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비록 자유분방한 자유를 누리지 못할지라도 예수라는 방주 속에 갇혀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는 동안에는 불편함과 답답함이 있더라도 그 속에서 감수하고, 수용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불편하거나 답답하거나 자유롭지 못했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갑갑하고 답답한 일로 불편을 겪었던 적이 있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았던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혹시라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불편 없이, 아주 편하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편안하게 마음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라는 방주 속에 꼭 들어가십시오! 왜냐하면 예수 방주 안의 삶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어항 속이 갑갑하고 답답하다고 어항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면 잠시 동안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지만 결국엔 파드득대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라는 방주 속이 갑갑하고 답답하다고 나오게 되면, 세상의 자유 속에 잠깐 동안은 몸부림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안에 갇힌 자유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인 것을 명심하십시오. 예수 안에 갇혀서 얻는 자유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만끽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십시오.
지금은 설령 갑갑하고 불편하더라도 참고 극복하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열어 주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게 하실 미래의 그날을 기대하면서 하루하루 힘차게 살아가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mission4jsc@gmail.com
09.25.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