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사랑의동산교회)
므낫세의 죄악
므낫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55년간 나라를 다스렸던 유다의 14대 왕이었다. 그는 히스기야의 아들로 어릴 적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히스기야가 누구인가? 다윗 이후 가장 훌륭한 왕으로 인정받은 유대의 왕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아들 므낫세는 유다의 역대 왕 중 가장 사악한 왕이었다.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 왕과 11년 동안 공동통치를 하면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고 신앙훈련도 받았지만, 아버지의 신앙을 외면하고 스스로 불신앙의 길을 택했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유대의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라고 하는지 살펴보자.
첫째,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냈던 산당들을 다시 건축하여 바알의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으며 일월성신을 섬기도록 했다. 둘째, 그는 인신제사를 하도록 허용했고 셋째, 신접한 무당 박수들이 마음 놓고 귀신숭배를 하도록 했으며 넷째, 자기에게 옳은 말 하는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는데, 전승에 의하면 저 유명한 선지자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전해진다. 다섯째, 그의 결정적인 죄악은 하나님의 성전 안뜰과 바깥뜰에 우상의 제단을 세워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를 했다. 이 정도면 유대의 역대의 왕 가운데 최악의 왕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람을 심으면 광풍을 거둔다
사람들은 악한 짓을 하면서 당장 문제가 안 생긴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을 줄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죄악을 보고도 못 본 척하시는 줄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실 뿐 악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고 죄를 그대로 방치하시는 분도 아니다. 시간이 문제일 뿐 죄악에게는 반드시 심판을 가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들어보자.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이 재앙의 소식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가슴이 내려앉을 것이다.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 궁을 달아본 추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심판하겠다. 사람이 접시를 닦아 엎어놓는 것처럼 내가 예루살렘을 말끔히 닦아 내겠다”(왕하21:11-13).
여기서 줄과 추는 건축할 때 건물의 균형이 맞는지를 재는 도구다. 하나님이 인간을 달아보시는 다림줄이나 추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앗수르 제국을 사용하셔서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사용하셨던 기준을 동일하게 유다에게 적용시키시겠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앗수르 군대로 하여금 택한 백성 유다를 공격하도록 하셨다. 그들은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므낫세 왕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므낫세를 쇠사슬로 묶어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킨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의 사람들은 전쟁 포로들을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대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들이 포로들을 끌고 갈 때는 발목을 끈이나 사슬로 묶어 짧은 보폭으로 걷도록 했고 가죽 끈에 묶은 갈고리를 턱이나 혀에 꽂았다. 그래서 앞에서 이끄는 대로 따라오지 못하면 그 가죽 끈을 잡아당겼는데, 잡아당기면 혀가 뿌리 채 뽑히든지 턱이 찢어지든지 했다. 이렇게 끌고 온 포로들 중 왕이나 고관들은 정복자들 앞에 무릎을 꿇린 채로 날카로운 창으로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고를 듣지 않고 그를 박해했던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가 바로 이런 형벌을 받았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회개를 받으시는 하나님
앗수르의 비문에 주전 648년에 유다를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므낫세가 즉위한지 49년 째 되는 해에 유다는 적의 침공으로 무너졌고 체포된 므낫세 왕은 사슬에 묶인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이다. 그가 12세 때 왕으로 즉위했으니까 49년째라면 므낫세의 나이 61세 때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악행을 참으로 오래 참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악한 행동에 즉시 심판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리신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포로가 되어 끌려가던 므낫세의 심경에 변화가 왔다.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열심히 섬겼던 하나님이 실제 살아 계시다는 것과 시간이 문제일 뿐 하나님은 죄에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지나간 일들을 자탄하며 눈물로 회개했다.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무서운 재앙은 그동안 자기가 지은 죄의 대가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역대하 33장 12-13절상반부의 기록이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지혜로운 사람은 평시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은혜 안에서 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환난을 당하고 매를 맞아야 비로소 깨닫고 회개한다. 그런데 더 어리석은 사람은 매를 맞으면서도 회개를 거부하고 고통 가운데 버티다가 죽는다. 므낫세의 회개를 받아주신 것을 보면 아무리 악하게 살았어도 하나님은 진심어린 회개를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느냐? 보다 얼마나 진심어린 회개를 했느냐? 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마음을 바꾸셔서 므낫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고, 그의 왕위를 회복시켜 주셨다.
역대하 33장 13절 하반부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 알았더라.” 이 구절은 므낫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신 분 역시 하나님이셨음을 므낫세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회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
그동안 한국교회는 참된 회개보다는 형식적인 회개를 가르쳐온 경향이 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의로운 길로 돌이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피상적으로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식으로 가르쳐왔다. 어느 날 이 부분에 대해 기도하고 응답을 받은 적이 있다. “영접 기도를 따라 한다든가,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주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구원을 받으며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는지요?”라고 기도했을 때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참된 회개를 해야 한다....” 진실한 회개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참된 회개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고백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하고 남에게 입힌 피해는 변상해야 하며 상처를 입혔으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거짓된 습관이나 음란한 행동, 시기와 질투, 비판과 참소에 익숙한 혀의 습관 등의 행실에서 벗어나 새사람의 행실로 돌이켜야 한다. 한 번에 완전할 수는 없지만 믿음에 있어서 회개는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이다. 예수님의 피가 내 모든 죄를 덮었다고 말하면서 뻔뻔하게 죄를 즐기며 사는 사람은 분명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도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도 아닐 것이다.
한 전직 경찰관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잡아 물고문과 전기 고문으로 반신불수를 만들기도 하고 골병을 들게 한 자로 악명을 떨치던 고문기술자였다. 그가 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신학공부를 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회개했다고 고백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언론 인터뷰와 간증 등을 통해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심문기술자였으며 고문은 곧 애국이고, 하나의 예술이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 그의 말이 사회적인 공분으로 비화되자 교단에서는 그의 목사직을 면직하고, 교단에서 제명했다.
남의 집 담을 넘어 고급 보석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이름을 떨쳤던 대도(大盜)가 목사가 되고, 폭력세계에서 잔인하기로 소문난 조폭두목이 목사가 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과거를 걸림돌로 삼을 이유는 없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사함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문제는 회개다. 그들은 어둠의 과거에서 전향했다고 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절도, 폭력, 협박, 사기 등으로 경찰에 체포되고 구속되었다. 참된 회개가 없었다는 반증이다.
복음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지 말라. 회개가 빠진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죽은 믿음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없다, 아름다운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져진다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라(마7:19).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을 했다 해도 현재 죄 가운데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는 죄의 종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믿음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일까? 아브라함이 옛 생활을 청산하고(회개)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따라갔기 때문이다(창12:4).
로마서 6장 16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사탄의 종인 동시에 주님의 종이 될 수는 없다. 히브리어로 회개를 주로 ‘나함’(욥42:6)과 ‘슈브’(시7:12)를 사용하는데 ‘나함은 후회하다 뉘우치다’라는 뜻이고 ‘슈브는 돌아가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서 멈추면서 스스로 회개를 했다고 생각한다. 죄를 죄로 인식하고 뉘우치는‘회’(悔)와 죄의 행실을 버리고 의의 행실로 돌이키는 것인 ‘개’(改)가 있어야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교회를 다니면서 여전히 죄를 즐기며 사는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 아니며,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죄와 맺었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회개다
죽음의 천사가 어린 양의 피가 대문의 설주와 상인방에 뿌려진 이스라엘인의 집은 넘어갔지만 피가 없는 애굽인의 집안에 있는 장자와 짐승들의 맏배들은 모두 죽였다. 피가 있는 집 안에 있으면 살인자든 간음자이든, 도둑이든, 사기꾼이든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이 없이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받았다.
어린양의 피로 보호받은 그들은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광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들은 믿음으로 광야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거역과 불순종을 일삼다가 결국 멸망한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비롯해 2세들뿐이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어린 양의 피로 구원 받고 홍해에서 세례까지 받은 자들이 아닌가?(고전10:2). 그러나 어린양의 피로 조건 없이 구원받았다 해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 마음 안에는 불신앙만 가득했고 결국 불순종을 일삼다가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다.
그들은 신약성도의 모형이요 그림자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면 그의 과거가 어떠하든 구원의 길에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약속의 땅 낙원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 중 믿음이 없는 가라지나 쭉정이는 출애굽 1세대처럼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다.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값싼 복음이 만연해 있다.
대형 집회를 하면서 결신자를 이끌어내는 한 가지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한 번 믿는다는 고백이 구원받는 방법의 정석(定石)처럼 굳어져버린 것과 많은 목회자들이 그것을 따라하며 심지어는 전도지의 영접기도를 한 번 읽기만 해도 구원받았다고 선언하면서 죄인들을 불못으로 밀어 넣는 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영원히 그 사람의 모든 죄를 덮기 때문에 조금도 구원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명하셨고(막1:15), 사도들은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남은 생을 걸었다. 회개는 죄와 사귀었던 심령을 철두철미하게 부수는 것이며 죄와 맺었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다. 회개는 천국 문을 여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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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