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언 18장 20-21절
이정환 목사

(뉴저지순복음교회)

인생의 모든 삶은 관계에서 시작하여 관계로 끝을 맺습니다. 태어나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시작되고 성장하면서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나 관계를 맺고 장성하면서 직장에서 상사와 사장과의 관계를 맺고 살며 타인을 만나 부부의 관계를 맺고 자녀를 낳아 가족의 관계를 맺고 삽니다. 인생은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의 대부분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비록 말을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수화나 표정 그 밖의 몸짓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감정을 전달하며 기대와 소망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이 세상에 어떠한 피조물보다 말을 잘하고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뜻과 감정과 꿈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말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하는 곳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하고 변화가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궁창이 생겨나라 말씀하자 궁창이 생겼습니다. 6일 동안 모든 만물을 지으실 때에도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따라 창조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여러 가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각인력입니다. 어느 대뇌학자는 뇌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말을 먼저 선포하면 모든 세포와 뇌의 영향이 말에 의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또 말에는 견인력이 있습니다. 즉 말은 행동을 유발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하고 선포하면 뇌에 박히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이 나의 행동을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말에는 성취력이 있습니다. 견인력을 넘어 성취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데일 카네기는 말하기를 ‘성공한 사람들은 세 가지 말 곧 ‘없다’ ‘잃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창조의 언어를 사용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통해 잃어버린 말의 권세를 되찾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말에도 창조적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는데,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돌보고 다스리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인간의 말에도 창조적 힘과 권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예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동물이 아담과 하와 앞을 지나갈 때,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일러 주었는데, 그때 불린 이름이 곧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권을 받아서 행사할 수 있었으며, 그 입술의 말에도 권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간교한 사단은 뱀으로 다가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부정하도록 하여 아담과 하와는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그들의 영혼이 죽고 저주 받은 땅으로 쫓겨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고, 영혼의 아름다운 말씀도 속사람 아담과 하와의 죽음과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못하고 마귀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자 결국 파멸의 길이 다가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가 살리는 언어가 아니라, 정죄하고 비난하고 죽이는 언어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아 자신들의 흩어짐을 면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며 의욕적인 삶을 살고자 탑을 쌓았으나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언어는 결국 혼잡하게 되어 나누어지고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잃어버린 말의 권세는 되찾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31절은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생각하면 끊임없이 염려와 낙심과 좌절 그리고 불안과 초조가 밀물처럼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가 계속되면 우리의 입술은 낙심과 좌절의 언어를 토해내게 되고 절망의 언어를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예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말의 권세를 찾는 방법은 바로 주님을 믿을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언어는 생명이 없는 언어와 같습니다.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은혜 가운데 나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삶에 소망의 언어를 선포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존재로 변화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면, 우리 입술의 말에 "권세"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산이 있어 길이 험하니 산을 뚫어 길을 만들면 참 좋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산이 없어지고 길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말에는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이 지나가다가 "저기 산을 뚫어 길을 내면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겠다" 말하면 머지않아 산이 없어지고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권세 있는 사람이 말은 환경이 변화되고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의 말에는 그런 능력과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당할 때는 예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입술의 말로 명령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의 문제, 생활과 직업의 문제, 어떠한 문제든지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이렇게 말로써 명령하고 계속 기도하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문제가 옮겨가는 것입니다.

저는 2000년 초반에 교회를 개척하며 고생하다가 허리디스크를 앓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쪽 다리에 마비가 올 정도로 심하였으나 그러나 끈질긴 기도로 주님께 응답받고 치유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1년 정도 후에 다시 다리가 저리며 허리디스크가 재발하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서 아- 다시 디스크가 재발했구나 하는 탄식과 함께 염려가 앞섰습니다. 며칠 동안 고통가운데 있다가 문득 제 자신이 깨달은 것은 내가 이미 1년 전에 주님의 은혜로 치료받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저는 단호하게 기도하며 선포했습니다. ‘나는 이미 주님의 보혈로 치료받았고 이미 치료되었다 나를 염려하게 하고 낙심케 하는 고통은 실상이 아니고 허상일 뿐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통증은 떠나가라’ 마음속에 나는 이미 치료를 받았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입술로 자고 일어날 때마다 선포했습니다. 결국 며칠이 지나자 통증이 씻은 듯이 떠나가고 현재까지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계란이라고 해도 유정란은 품으면 생명이 생기지만 무정란은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존재로 항상 믿음과 소망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문제는 항상 다가옵니다. 그러나 문제를 만날 때 주저앉고 낙심하는 것이 아닌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선언하는 은혜의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요?

 

1)먼저 우리는 축복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축복의 언어는 사람을 살리는 언어입니다. 무슨 말을 하던지 축복과 은혜의 말을 해야 합니다. 건강하다, 씩씩하다, 좋은 일을 할 것이다, 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실제로 언어생활이 사람의 인생에 2/3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학업도 사업도 모두 말을 통해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달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고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에 있고 혀의 열매를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말과 고백이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잠언 13장2절에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어떤 말이 복이 되기도 하고 어떤 말은 화가 되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에는 사람을 살리는 창조적인 능력이 있고 반대로 사람을 죽이는 파괴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3장5-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말을 잘하면 축복받지만 말을 잘 못하면 망한다는 말씀입니다. 

테네시 주의 작은 마을에 한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체구가 작고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자녀들이 그 아이와 노는 것을 금했습니다. 동네 아이들도 무시했습니다. 외톨이로 지냈는데, 12세 때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호기심이 생겨 교회에 갔지만,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 늦게 갔다 일찍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혜를 많이 받고 감동의 여운이 남아 앉아있다 교인들 틈에 끼어 나오게 됐습니다. 마주친 목사님이 말합니다.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모두 멈춰버렸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네 아버지를 닮았잖아.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당황하여 빠져 나가는 아이의 등을 향해서 목사님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꼭 훌륭한 사람이 되라!” 세월이 흘러 그는 주지사가 됩니다. 그의 이름은 벤 월터 후퍼! 테네시 주지사(1911-1915) 그는 후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날은 바로 테네시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한 사람의 축복이 이와 같이 한 영혼의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27절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축복을 명하셨습니다. 우리의 삶과 인생이 축복하고 격려하는 인생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우리는 감사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시편 50편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상황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을 마치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고 난 후 감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먼저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사전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일을 마친 다음 즉 사후에 감사를 해도 좋은 일이나 예수님은 먼저 일이 있기 전에 사전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우리도 먼저 감사의 언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십니다.

시편 100편4절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고 말씀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문을 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고난과 역경가운데서도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빌립보 감옥에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지더니 결국 영혼을 구원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의 어려움과 상황가운데서도 우리는 감사로 한 해를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며 구원받은 우리가 또 다른 영혼을 천국 백성 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축복된 언어는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의 생명을 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6장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천하보다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주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셨고 세상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며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며 한 영혼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더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의 말을 선포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시며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선언은 우리에게 참된 소망과 꿈을 주셨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축복의 말, 감사의 말, 그리고 복음의 말을 전하며 소망과 꿈을 가지고 달려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goodchurch@gmail.com

01.30.2021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