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이 내게 복이라

시편 73편 1-28절
장덕상 목사

(필라 한인개혁장로교회)

1. 사마천이 묻고 성경이 답하다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BC145-86)은 사기(史記) 열전(列傳) 중의 백이(伯夷)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백이와 숙제는 어질고 깨끗해도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고, 도척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몸을 육포로 만들어 먹었지만 천수를 누렸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이것이 하늘의 도라면, 그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 

중국인들에게 하늘의 도리는 우주를 다스리는 신적 섭리를 뜻하는 것이기에 이 질문은 ‘하나님이 선하신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신학적 물음과 같습니다. 비록 사마천은 시편을 읽어본 적이 없고, 시편의 기자도 사마천의 물음을 직접 듣지 못했지만 동일한 질문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한 대답이 시편 73편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선하고 의로우시며, 악을 벌하고 선을 보상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이 땅에서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고통 받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일까요? 정의가 악을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악인들의 힘이 날로 뻗어 나갑니다. 악에 따르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누구나 처할 법한 곤경에서도 그들은 요리조리 잘 피해갑니다. 선에 따르는 보상은 없고 잘되는 쪽은 악인들이니 사람들은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고 믿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시편의 73편 기자도 바로 그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2. 시인이 넘어질 뻔했던 문제

 

시인은 먼저 우리가 가진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1절). 그는 답을 압니다. 그러나 고민 없이 정해진 답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전제입니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문제가 분명히 보입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절).

문제는 ‘악한 사람들이 형통할 뿐만 아니라,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합니다’(4절). 심지어 사람들이 모두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재앙도 그들을 피해가는 듯합니다(5절). 지금도 우리는 그런 모습을 목격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불법으로 권력을 찬탈했으며, 수천억원의 부정에 대한 추징금도 내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자기의 전 재산은 29만원이라 하면서도 매일 골프를 치러 다니며 노년을 아주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6-8절). 그들의 뻔뻔한 모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데, 문제는 그들이 너무나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9절의 표현처럼 그들의 혀는 땅을 휩쓸고 다니며 심지어는 하늘에 대해서도 막말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잘된’, 그들의 눈에 ‘성공한’ 사람들의 편으로 모여듭니다(10절). 결국은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이 환영을 받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아시면 어찌 처벌하지 않으시느냐고 묻습니다.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1절). 그리고 시인은 악인에 대한 묘사를 이렇게 결말짓는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12절). 그래서 그는 씁쓸하게 호소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절). 왜냐하면 악인은 번창하는데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14절). 악인이 이렇게 잘 되는 것이 현실이라면, 의롭게 살기 위해 애쓴다는 것은 헛일이라는 말입니다. 정의는 보상되지 않고, 악인들은 한몫 단단히 챙기는 것이 세상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 문제에 대한 잘못된 접근방식

 

그러나 시인은 곧 자신이 휘청거리며 거의 넘어질 뻔 한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는 자신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첫째, 그는 악인을 질투했습니다(3절).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하나님을 벗어난 자유는 결국은 죄의 노예가 되는 사슬일 뿐입니다. 방종하는 자유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는“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23:17)고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쓴 마음을 품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21절을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라고 번역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쓴뿌리(bitterness)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짐승과도 같이 우매하고 무지한 일임을 깨닫습니다(22절).

셋째, 그는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심한 고통이 되었고’(16절),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절망감으로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던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을 봅니다. 양심 없이 사는 자들은 뻔뻔하게 오래 사는데, 오히려 양심적인 사람들이 작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문제는 내 스스로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때에 혼란스럽고 절망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절) 오직 겸손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지각이 열립니다. 그들의 종말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정의의 문제를 고민할 때, 악인들을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봐서도 안 되고, 스스로를 자기연민에 빠져 바라보아서도 안 됩니다.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 하다가 절망에 빠져도 안 됩니다. 해답은 우리가 겸손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4. 근본적인 해결책

 

문제 속에 사로잡혀 자기 속으로만 파고들면 문제의 종이 되고 맙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로부터 떨어져서 더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의 문제 속에서 미로처럼 헤매면서 그 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이야기 전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모든 이야기의 ‘결국’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 인생과 역사의 ‘결국’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부조리들이 지금은 그냥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잘못은 바로잡힐 것이고, 악에 대한 대가는 치러질 것이며, 선은 최후 심판 때 보상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의 관점이 교정되고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파악한 것은 ‘그들의 종말’(their end)이다. 지금은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습니다(18절). 그들이 가는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마7:13)입니다. 결국 죽음이 그들을 찾아 전멸시킬 것입니다(19절).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하는 것같이, 그들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20절).

악인의 운명이 이러하다면, 의인은 운명은 아주 다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3절). 경건치 않은 자들이 지금은 득세하지만 마지막에는 패망할 것이요, 경건한 자들은 지금은 물론 영원토록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이 땅에서 결핍과 핍박으로 고난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부요함을 누립니다. 시인은 그 백성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장 멋지게 표현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25절)

하늘과 땅, 시간과 영원을 통틀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영원한 분깃’(기업)이십니다(26절).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분깃이요 나의 기업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 되시면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사귐이 영원한 생명이다. 죽음은 이 사귐을 방해하거나 파괴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깨닫게 된 경건한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의 엇갈리는 운명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줍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7-28절).

무엇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 더한 복이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복된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12:2, 새번역). 예수님은 이 믿음의 길을 여셔서 그 고난의 길로 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리의 주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또한 영광의 주로 다시 오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믿음의 완성자가 되십니다! 그분은 머나먼 종말에 대한 막연하고 불안한 기대를 우리의 현실 속으로 가져 와 온전히 성취하신 분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선취된 종말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왜곡된 현실 앞에서 날마다 유혹을 느끼고 당혹감을 느끼는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수천년 전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양심의 소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씨름해온 고민입니다. 답은 오직 예수를 바라보는데 있습니다. 그와 함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그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부활 승리하시고 다시 오실 그분을 통해 이루어질 그 나라를 바라봅시다. 

악인들은 여전히 하늘과 땅이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갖는 것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하며 사는 우리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krpcpastor@hotmail.com

08.22.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