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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자! 목 놓아 울자!

예레미야애가 3장 40-54절
이준성 목사

(뉴욕 양무리교회)

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부터 20명이 통치했고 르호보암 이후 약 345년 동안 지속되다가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종종 히스기야(13대)나 요시야(16대)같은 괜찮은 왕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악한 정치를 하다가 20대 시드기야 왕으로 종말을 고하며 예레미야는 약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마지막을 지킨 사역자입니다. 

유다 왕국은 세 번에 걸쳐 바벨론의 침략을 당했는데 첫 번째 침략 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포로로 잡혀갔고, 두 번째 침략 때에는 에스겔이, 그리고 세 번째 침략 때에는 완전히 멸망을 당하여 하나님의 성전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바벨론 군대가 포위한 BC 588년 10월 10일부터 완전 멸망한 BC 586년 4월 9일까지 1년6개월 동안 전사자와 아사자가 속출했으나 여전히 시드기야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이 망했을까요? 본문은 죄악의 심각성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왕하24:19-20, “그가 여호야 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쫒아내실 때가지 이르렀더라” 이런 절박함에서 지도자도 백성도 죄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COVID-19?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도자도 성도도 회개하지 않고 경제에만 신경 쓸까요? 하나님께서 경제적 압박 때문에 주신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시대에 회개의 경고로 주신 사건을 경제문제로 삶의 문제로 둔갑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애가에서는 “슬프다”라는 단어가 3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리고 “눈물”이라는 단어는 6번이나 나옵니다. 무엇이 그렇게도 슬프고 눈물이 날 사건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나 나라가 망해가는 처참한 모습에 슬프고 눈물로 밤을 세운다는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1. 돌아가자!(v40)

 

렘25:5에서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왜 국가가 망하고 민족이 망하며 개인이 멸망합니까?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남의 탓이지 내 잘못은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를 조사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은 “우리 모두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고”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을 조사하고 생각해보면 죄악의 근본은 자신임이 금방 드러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회개라 하고 회개는 자신이 죄인임을 전제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으면 과감히 돌아가야 하듯이 지금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최선의 길입니다. 

본문 47절은 “두려움과 함정이 우리 위에 임하고 황폐함과 멸망이 닥쳐왔습니다”라고 호소합니다. 두려움과 함정이 우리 위에 임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폐함과 멸망이 닥쳐왔을 때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습니까? COVID-19라는 천벌이 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수많은 올무들이 있습니다. 사망의 올무(시18:5)와 밥상의 올무(시69:22) 그리고 악한 자들의 올무(시64:5) 또 새 사냥꾼의 올무(시91:3)가 있고 우상의 올무(시106:36)도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는 올무에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점검하고 살펴보며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자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 부터 점검해야하며 정직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점검이 없는 자들의 결과는 하나님의 분노의 매로 고난당하게 되어 있습니다(3:1). 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롯에게는 고난입니까? 왜 노아시대의 홍수가 노아에게는 고난입니까? 왜 배교운동이, 동성애가, WCC가, 종교탄압이, 십계명 철폐가, 차별금지법이 신앙으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에게는 고난입니까? 

결론은 믿는 자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의 매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매를 알기에 눈물로 호소하면서 “돌아가자”고 외칩니다. 

 

2. 마음과 손을 들자!(v41)

 

마음을 들고 손을 드는 것은 항복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경제나 정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항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왜 우리의 기도가 막히고 상달되지 않습니까?(v44) 그것은 우리들의 죄 때문입니다(3:39). 우리가 마음과 손을 들어서 하나님께 항복한다면 왜 기도가 막히고 경제나 정치가 막힙니까? 우리는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 그것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손과 마음을 들지 못하는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데(약1:15) 사람이 죽는 것은 돈이나 질병이나 가난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출발은 욕심이라는 덩어리입니다. 돈 번다고 죄짓는 현실은 인신매매를 했던 가룟 유다와 같습니다. 주일도 일하는 예수 믿는 자들은 아직도 마음과 손을 들지 못하고 자신 욕심 따라 죄짓는 자녀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그런데 그 죄를 출발시키는 원인이 욕심이며 그 욕심의 배후는 마귀입니다. 성경은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요8:44)라고 마귀를 설명합니다. 모든 망한 일 뒤에는 반드시 욕심이라는 죄가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복해야 살 길이 열리는 것이 인생들입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죄의 열매가 나옵니다. 도둑놈은 도둑질을 하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임을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원죄는 사탄으로 기인했지만 그 현상인 자범죄는 원죄가 있는 우리들의 자연스런 열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더욱 하나님께 항복하는 진실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말씀과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항복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울자! 목 놓아 울자!(v50)

 

50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울자! 목 놓아 울자” 내 죄를 놓고 목 놓아 울자!

죄의 고통을 뼛속 깊이 느꼈다면 그 아픔을 알았다면 다시는 죄 짓지 않도록 목 놓아 울자는 것이 선지자의 절규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48절, “딸 내 백성의 멸망으로 인해 내 눈에서 눈물이 강같이 흐르도다” 선지자는 이 아픔에 깊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민족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의 고통에 무감각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으로 승화시킵니다. 그들의 멸망에 대한 고통이 너무 커서 눈물이 강같이 흘러내리며 그 눈물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때 까지 계속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COVID-19 사태를 보면서도 나만 살겠다고 포위망을 치는 우리들과 이스라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함께 느끼는 선지자의 모습을 비교하면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 3가지가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신 눈물(요11:35) 휴머니즘을 포함한 눈물입니다. 물론 휴머니즘 자체가 신앙은 아니지만 신앙은 휴머니즘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예루살렘의 멸망 앞에서의 눈물(눅19:41)입니다. 애국심 자체가 신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안에는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도 포함되어야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눈물(마26:37. 히5:7)입니다. 인류의 운명을 바꿀 십자가의 눈물이며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눈물입니다. 모든 인류가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모든 인류가 구원 받도록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파멸로 이끄는 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렘23:30)들입니다.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렘20:1). 요시야의 아들 살룸(여호아하스). 그의 아들 여호야김(엘리야김). 제사장과 선지자와 모든 백성 그리고 궁중의 고관들(렘26:8). 선지자 하나냐(렘28:10). 스마야(렘29:31). 유다왕 시드기야(렘32:2)... 총체적으로 도둑놈들이고 도둑놈 국가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인생(애3:25-26). 말씀이 도둑질 되어지는 이 시대에 포기하지 않고 기도와 전도와 찬양으로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저주를 복으로 그리고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눈물과 같이 포기하지 말고 여호와의 긍휼에 의지하여 눈물로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미국을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과 민족을 위해 또 세계 열방의 선교를 위해 얼마나 통곡하며 목 놓아 울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들을 위하여 회개하고 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항복하며 목 놓아 우는 일에 우리는 관계가 없습니까?(애가1:12)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의 무의미합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 “부르짖으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망하지 마십시오. 저주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 여호와를 떠나지 마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간단하게 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길르앗에는 유향(말씀)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예수 그리스도)가 있지 아니한가”(렘8:18-22).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울면서 항복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입니다. 

나는 내 잘못에 대하여 언제까지 핑계나 변명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를 객관화하고 나를 분석하여 철저히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입니까? 어려움이 왔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까? 나는 이웃의 아픔을 외면합니까? 이웃의 아픔에 동참합니까? 그 고통을 나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진짜 이웃과 나라와 민족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까?(애1:12). 신앙이 망해가는 이 시대에 눈물을 시내처럼 흘리면서 하나님을 붙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flocks3927@gmail.com

05.3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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