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장로교회
공산주의가 세력을 뻗치고 있던 1970년대에 전 세계 자유 진영의 대학생들이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모여 국제대학생대회를 열었습니다. 그 때 토의의 주제 중 하나가 “오늘날 우리 대학생들의 진정한 고민이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나타난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오늘날의 자유 진영의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정열을 온전히 불태우고 자기들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산주의 국가에 사는 대학생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자기들은 열 번이라도 죽을 수 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무슨 매력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스탈린과 경쟁하던 트로츠키가 멕시코로 망명한 후에 암살당하기 6개월 전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작성했던 유언장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왔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리라!”
트로츠키는 미래에는 전 세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이며 그 세계는 부가 고르게 분배되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매력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황된 꿈이었고 역사 속에서 실패한 이론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위해 자신의 정열을 불태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가슴 뛰게 하고 피가 끓게 하는 일을 하며 살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사도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가슴이 뛰고 피가 끓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 사랑에 미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어 그 분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1. 왜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주님은 목숨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행복감을 주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처럼 사랑하사, 이것은 하나님의 기막힌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숨까지 버리신 기막힌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동양에 와서 선교했던 유럽의 한 선교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천당에 가고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까 두려워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중략... 축복을 바래서나 상급을 바래서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신 당신이 너무도 좋아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포로가 되어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뜨거운 가슴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그토록 사랑해야 합니까? 주님이 그런 사랑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말을 한 마디로 한다면 “미치도록”입니다. 목숨 걸고, 죽도록입니다. 예수 사랑에 미친 사람들은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1세기에 베드로의 후임으로 안디옥교회의 감독이 되어 근 40년 동안을 사역한 익나티어스는 AD 107년경에 체포되었고 순교 당하기 위해서 로마로 압송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는 사자의 밥이 되어야 했습니다. 로마교회는 그의 구명운동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익나티어스는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살아날 줄도 기대하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알로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지는 깨끗한 빵 한 조각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만 있다면 뜨거운 불에 타죽든지 칼에 목 베임을 당하든지 짐승의 이빨에 찢겨 죽든지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게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있을 뿐이다.”
예수 사랑에 미친 사람의 담대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활화산처럼 뜨겁게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택한 백성들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혼자만이 하는 사랑은 짝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짝사랑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를 사랑하여 조국과 아버지를 배반하고 나라의 보물인 자명고를 칼로 찢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호동왕자를 사랑하였기에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낙랑공주의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알아주는 이가 있는 맞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알아주는 이 없는 짝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하늘의 국경을 넘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몰랐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가 널 미치게 사랑하여 목숨까지 버렸으니 너도 나를 그렇게 사랑해다오” 주님은 당신의 짝사랑이 이제는 맞사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맞사랑은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뜨거운 가슴으로 껴안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짝사랑의 아픔이 아닌 맞사랑의 기쁨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주님을 미치도록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사랑의 행복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런 사랑의 대상과 결혼한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이 현재 아내나 남편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면 그 분은 예수님도 미치도록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어떤 분이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면 그 분은 자신의 아내나 남편도 그렇게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미치게 사랑하면 그 사랑이 신비하게 흘러 넘쳐서 부부 사이의 사랑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부부가 서로를 미치도록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흘러넘쳐서 주님을 미치도록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주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5절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치는 그가 무엇에 목적을 두고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어도 참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자기만을 위해 살아갈 때 그는 생의 의미와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삶의 목적을 두면 그 순간부터 생은 눈부시게 변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에 늦은 나이에 외동딸을 얻은 시인이 있었습니다. 옥이야 금이야 하고 귀하게 기른 딸이 스무 살이 좀 넘었을 때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70이 넘은 아버지는 딸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가 선교사로 가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내가 죽은 후에 갈 수는 없겠니?” 딸은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두고 떠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요. 저 아버지를 정말 사랑해요. 그러나 저는 지금 가야만 해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요”
마침내 딸이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딸을 태운 배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던 아버지는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이천 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인 예수여 그대는 나에게서 심장과 생명을 도려가는구나. 그대는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그대는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어찌하여 내 품에서 생명 같은 딸을 빼앗아 가는가. 생명의 약탈자여. 사랑의 약탈자여”
그러나 여러분! 그분은 생명의 약탈자가 아닙니다. 사랑의 약탈자가 아닙니다. 도리어 약탈당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약탈당하시고 빼앗기셨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빼앗길 차례입니다. 소중한 시간을, 물질을, 재능을, 젊음을, 정열을 주님 위해 빼앗겨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을 위해서 빼앗기는 것은 고통이 아닙니다. 괴로움이 아닙니다. 도리어 기쁜 일입니다.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있느라 빼앗겼던 시간 때문에 후회한 적이 있습니까? 피땀 흘려 번 돈을 사랑하는 자식의 대학 등록금으로 빼앗기는 것이 슬프던가요? 사랑하는 가족을 행복하게 하느라 빼앗긴 젊음이 한스러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후회스럽지 않은 거룩한 빼앗김이었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의 대상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할 때 더 큰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것을 희생한 사람들은 남이 알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행복한 신앙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미친 사랑을 품고 살아가 보십시오. 받는 것에 익숙하지 말고 주는 것에 익숙해 보십시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남을 사랑해 보십시오. 복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바치기를 힘써 보십시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도 식어버린 가슴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그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냉냉한 가슴이라면 그 가슴에 예수 사랑의 불을 지르십시오. 그래서 그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이 여러분을 삼켜버리게 하십시오.
“사랑하는 나의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주님 없는 삶은 너무나도 무의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타는 가슴으로 주님을 껴안기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전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주님에게 미치지 않고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 주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나는 주님께 미친 사랑을 품고 평생을 살렵니다. 샘처럼 솟아나는 열정을 품고 주님만을 영원히 사랑하렵니다“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뜨거운 감동으로 고백이 터져 나온다면 그 순간부터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기쁨을 알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이토록 황홀한 것인가 하고 탄성을 지를 것입니다. 예수 사랑에 미친 사람이 되십시오. 세상에 부러운 것도 부러운 사람도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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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