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장로교회)
선교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을 보니까 ‘선교란 종교를 선전하여 널리 폄’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기독교에게 선교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이에 진정한 선교란 단지 선교사님들을 선교지로 파송하는 일만이 아닌 것입니다. 선교란 그야말로 예수님의 명령대로, 우리 자신이 그 명령의 수행자로써,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혹은 더 나아가 다른 문화권이나 다른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만을 선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를 믿고, 그의 말씀에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직접 선교사로 활동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20여 년간 현대교회들에서는 ‘선교적 교회운동’(Missional Church Movement)이라는 교회갱신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선교사님들보다도 지역교회와 성도들 스스로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적 태도, 사고, 행동, 실천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교적 교회운동은 교회를 프로그램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 관심을 내부에서 외부로, 또 프로그램 개발에서 인간개발로, 그리고 교회기반에서 보다 넓은 하나님 나라 기반으로 이동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에 텍사스 어스틴(Austin) 라이프교회의 조나단 닷슨 목사님은 선교적 교회 실천의 방법으로 여덟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1)신앙 갖지 않은 동료, 이웃과 식사하라. 2)주로 걷고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하라. 3)웃어라. 질문하라. 친구가 되라. 나눠라. 4)비기독인들과 취미를 함께 하라. 5)동료 4명 선택해 그를 위해 기도하라. 6)비영리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라. 7)TV보는 대신 지역사회 행사에 참여하라. 8)크고 작은 이웃의 일에 도움주고 섬겨라.
선교적 교회운동은 한 마디로 교회가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게 하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교제도 나누고, 친구도 되어주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봉사하고 섬기며, 영향력 있는 일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새로운 말이 아닙니다. 이름이 거창해서 그렇지, 사실 이것이 본래 기독교 신앙이죠.
신약의 교회가 처음으로 태동된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복음 전하는 일들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42절에서도 보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또 먼 곳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 22절에서는 안디옥에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고,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안디옥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또다시 소아시아 지방으로 선교를 보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오늘날에 와서야 선교적 교회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부터가 본질적으로 선교적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운동이란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교회개혁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너무나도 분주하고 염려가 많은 삶을 살다보니까, 도리어 교회는 영적으로 태만해져서 본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가 본질을 회복하려면 근본적인 회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가?
본문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는지를 몇 가지로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충만함을 통한 영적부흥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는데요,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니까 저절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게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도 기도에 힘쓰면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고, 성령충만을 받으면 저절로 선교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지식이 부족해서도, 물질이 부족해서도, 프로그램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것은 성령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둘째, 평안보다는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변교회 원로목사이신 김명혁 목사님은 어느 언론사와의 대담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근현대사 70년 동안 하나님의 매를 맞았다.” “그게 오히려 역설적 축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고난 없이 편안하고 부유한 시기라서 한국교회에 분열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고난으로 더욱 천국소망의 신앙으로 단단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고난이 와야 한다는 것이죠!
이에 우리에게도 고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우리에게 영적 태만함을 가져온다면, 그것은 도리어 저주를 불러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난도 필요한 것인데, 그러나 우리가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무슨 고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이 없는 것은 우리가 고난이 없는 환경에 살아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인 사명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위기감을 가지고, 다시금 기도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세상으로 나아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험과 핍박이 오고, 고난이 오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절대로 망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더욱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고난이 옴으로 더 하나가 되어 더 놀라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우리의 게으른 영적 삶인 것이지, 결코 고난을 자초하는 선교적 삶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 표적과 기사와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손길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기도를 통한 성령충만과 전도의 결과라고 하겠지만, 이에 우리의 기도와 전도는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하나님 앞에 더욱 헌신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사도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라고 했는데, 이것은 1절로 11절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가장 먼저 연관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는 이런 표적과 기사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라, 처음 초대교회가 태동할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병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기적, 핍박 가운데도 죽지 않고 승리케 하시는 기적 등, 여러 가지 기적이 초대교회 가운데 늘 나타남으로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도 전도에 힘쓰며, 또 예수를 믿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가 오늘날의 교회 가운데 나타나기 위해서 정말로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한인사회는 복음화율이 높고,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은 거의 끊어졌다고 봐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을까요?
그러나 잘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믿지 않거나 혹은 교회에서 상처받고 방황하는 영혼이 많고, 무엇보다 예수를 믿지 않는 많은 다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대상자가 없어서 전도를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있는 변명이 아닌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유일한 지상명령입니다. 그만큼 중요하며, 또한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가장 가치 있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여러분의 남은 생애,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이 일을 잘 하셔서, 이 땅을 떠나는 날, 저 하늘나라에서 더욱 귀한 상급을 받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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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