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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여,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 2장 10-17절
이경종 목사

(필라델피아장로교회)

그리스 시라쿠사 거리에 동상 하나가 서있는데, 관광객들은 묘하게 생긴 이 동상을 보고 처음에는 모두 웃는답니다. 하지만 그 밑의 글을 보고는 많은 '감명'을 받는다고 합니다. 동상의 형상을 보면 앞머리는 숱이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대머리이며 양발 뒤꿈치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양손엔 각각 저울과 칼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기회의 신 ‘카이로스’인데, 그 모습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기회라고 여겨질 때 쉽게 잡을 수 있도록 앞머리가 무성하며 일단 지나가고 나면 붙잡지 못하도록 뒷머리는 대머리라고 합니다. 양발 뒤꿈치의 날개는 기회를 잡은 사람과는 높이 날아오르고 기회를 놓친 사람으로부터는 재빨리 도망치기 위함이라고 하니 찾아온 기회를 잘 포착해야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때’를 잘 볼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믿음의 기회도 왔을 때 잡아야 합니다. 그 때가 바로 ‘언제나, 늘, 항상’이지만 더 적극적으로는 ‘바로 지금, 오늘 현재’입니다. 고후6:2절에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 지금 주님의 애틋하신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고 계십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이 음성을 듣고 우리 모두가 아멘으로 주님의 초청에 화답 하면서 우리의 삶의 여정에 사랑과 소망과 믿음으로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가기’ 위하여 본문을 통해서 3가지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일어나서 함께 가기 위해서 말씀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10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의 주인공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술람미 여인은 교회와 성도의 모형입니다. 역사가에 의하면 술람미 여인은 뛰어난 미모도 없고 삶의 배경도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농부의 딸로 천한 신분을 가진 여인에 불가합니다. 그런데 술람미가 살고 있는 농촌 마을에 솔로몬 왕이 찾아왔는데, 솔로몬은 그만 술람미 여인을 보고 한 눈에 반했고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위기는 더욱 사랑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돈이나 명예나 세상의 어떤 권력도 아닌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때대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나 삶의 현장에 거친 들과 같은 원치 않은 어려움이 밀어 닿치기도 하지만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에게 위기가 찾아왔을 때 저들이 사랑으로 극복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가족과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할 때 위기가 더 귀한 은혜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해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 속에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엡3:17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측량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까지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분이 누구신가요?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스바냐 3:17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참으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하신 마음이 느껴지지 않나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아버지의 영광의 자리에 초청해 주시는 이 음성을 매일 매순간 듣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원합니다. 

스바냐 3:17절의 말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랑하는 자여 일어나 함께 가자!’가 아닐까요? 성도된 우리가 이 같은 사랑의 언약을 붙잡을 때 이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때도 자신의 방법과 의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벧전 4: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런데 이 말씀은 개역개정 성경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영어 성경은 ‘Deeply’ 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는 ‘깊이 혹은 강하게’ 라는 뜻으로 사랑의 방법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깊이, 진실로 사랑하는 길은 내 기분과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말씀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열심히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남은 삶 가운데 우리도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입었기에 이처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원합니다.

 

 2. 일어나서 함께 가기 위해서 은혜 안에서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4절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솔로몬은 자신이 사랑하게 된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의 다정함에 비유하면서 “네 소리를 듣게 하라” 여기에서 ‘소리’라는 말은 ‘달콤하다’ 혹은 ‘기쁨을 준다’라는 것으로 성도된 우리가 주님을 찬송할 때 그 소리를 우리 주님이 기쁘시게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코 우리 주님은 벙어리 신부와 교제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 남녀가 사랑으로 결혼을 하고 살아가면서 행복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대화가 아닐까요? 비둘기처럼 다정한 속삭임, 사랑의 표현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며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가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다정한 대화 즉 은혜 안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려울 때 격려와 위로로 대화하며 극복해 나가는 것이 행복인 것처럼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할 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입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실 신부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가정이 행복할리라 없습니다. 이처럼 기도가 멈춰버린 영혼은 회칠한 무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신부되는 우리는 항상 신랑 되시는 주님을 불러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의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며,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기도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시편 100:4절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께 아침마다 깨어서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큰 소리로 감사 찬송하면서 하루를 마감하겠노라 결단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일어나서 함께 가기 위해서 믿음 안에서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본문 15절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포도 꽃필 무렵에 작은 여우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우들이 하도 많아서 포도원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작은 여우들이 포도원을 헤집어 놓고 꽃을 다 떨어지게 해서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결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는 작은 여우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생활을 방해하는 작은 여우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깨뜨리는 작은 여우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까요?

여우의 특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마디로 여우는 교활하며 간교합니다. 의심이 많고 가식적이며 거짓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작은 여우는 잘 보이지 않고 은밀한 곳에 숨어 우리의 가장 약한 곳을 공격합니다. 작은 여우로 비유된 말씀이 벧전5:8절에서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우리를 안팎으로 공격해옵니다. 밖으로는 세상의 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신앙을 무너트리려 합니다. 이미 창세 이후로 인류가 죄 가운데 빠지면서 마귀는 육신의 오감을 자극하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유혹으로 넘어뜨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맞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작은 여우는 세상 속에 숨어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싸워서 물리치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작은 여우는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인 된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작은 여우를 품고 태어납니다. 다행이 어떤 사람은 일찍이 신앙으로 작은 여우가 있음을 알고 물리치기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작은 여우의 교활함과 거짓에 속아서 오히려 그 종자가 번식하여 온통 여우 소굴이 되어버린 심령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딤전 1:19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동등한 위치로 말씀합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누구도 착한 양심 앞에 자유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태초에 주신 성결의 영, 거룩한 영인 착한 양심을 위하여 몸부림쳐야할 때가 지금인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도대체 착한 양심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엡5: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허무는 작은 여우가 안팎으로 있음을 알고, 마귀를 믿음으로 대적하며 싸워서 믿음과 선한 양심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logosnews@hotmail.com

06.1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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