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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을 쳐서 은 나팔을 만들라

민수기 10장 1-2절
이기성 목사

(밴쿠버 삼성교회)

실천신학자인 워터 핸릭슨(W. Henlikson)은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과정과 삶을 통해 제자화 되어 가며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져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선교신학자인 보시(D. J. Bosch)도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도상 위에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즉 미숙에서 성숙으로, 부족에서 완전함으로, 결핍에서 충만으로 나아가는 존재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또한 ‘나는 지금 무엇에서 무엇으로 만들어져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그리스도인의 위기는 결코 외부적인 어떤 재화와 소유의 있고 없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자기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인 자기 물음이 없다는 것이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매일 물어야 합니다. 묻되 내가 무엇을 얻어야 할지, 쟁취해야 할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에서 무엇으로 만들어져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욕망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찾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모든 인생의 물음에 대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을 주목해 봅시다. “은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은덩이가 은나팔’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은덩이가 은 나팔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은덩이가 은나팔이 되기 위해서는 은나팔을 만드는 전문가에게 붙잡혀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은덩이가 다 은나팔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나팔 전문가에게 붙잡히는 은덩이만이 은나팔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조금 못생겨도, 질이 좋지 않아도, 색깔이 곱지 못해도 은나팔 전문가에게 잡히기만 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은덩이 자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전문가의 재창조 하는 능력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우리의 인생을 재창조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인생의 해법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은 세상의 재미에 이끌려 쾌락에 붙들리고, 정치에, 권력에, 자기의 꿈과 생각과 편견에 붙들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술과 마약과 같은 것에 붙들려 끊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조금 부족한 은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를 귀한 은나팔로 만들어 가십니다. 내 인생의 새 창조자이신 하나님 손에 붙들릴 때 우리는 가장 가치로운 은나팔로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위대한 인생을 살고 싶은가 그러면 하나님께 붙들려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셨습니다.  

은덩이는 은덩이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어서 은덩이 자체가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즉 소유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 은덩이가 그 소유의 기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른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즉 은나팔의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은덩이 자체는 단지 소유의 기쁨만을 주지만, 은나팔은 사명의 기쁨을 줍니다. 나를 넘어서는 기쁨을 줍니다. 은덩이는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기쁨이 바로 은 나팔에게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은덩이의 기쁨입니까? 아니면 은나팔의 기쁨입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 전에는 은덩이의 기쁨에만 머무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 속에 있었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지식, 지위, 명예, 권세가 기쁨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린 뒤에는 기쁨의 이유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기쁨의 서신이라고 하는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다음으로는 은덩이가 은나팔이 되기 위해서 속이 다듬어져야만 합니다. 

 

속이 다듬어져야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은덩이 그 자체는 소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은은 금속가운데서도 마찰소리가 가장 작습니다. 다른 금속들은 부딪칠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만 은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은덩이 같은 성도가 있고, 은나팔 같은 성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만을 먹고 소리도 내지 못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세상을 향해서 나팔처럼 울리며, 전하며 사는 성도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은덩이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속까지 가득 채워져 있는 은덩이를 비워내야만 가능합니다. 속을 비워내야 말씀이 그 속에서 공명을 만들어 내고 공명된 그 소리가 청아하게 밖으로 울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속이 다듬어 지고 완전히 비워져야 청아한 나팔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으시자마자 은나팔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때부터 우리의 속과 내면을 다듬어가기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내면에 쌓여있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들, 불순물들, 욕망의 찌꺼기들을 깎아내시고, 청소하시고, 연마해가기 시작하십니다. 

은나팔은 쳐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강제적인 방법도 쓰시고, 위로도 하시면서 우리의 속을 다듬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이 작업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장 완벽한 은나팔이 될 때까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낼 때까지 우리의 속을 다듬어가시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 나팔이 되어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즉 온전한 신앙고백이 울려 퍼지게 하십니다.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은 86세까지 사역을 하며 로마 위정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결국 화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박해자들이 화형 직전에 살려줄 테니 예수님을 부인하라고 회유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평생 나를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겠는가?”라는 고백을 하고 순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은나팔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은나팔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 나팔은 자신의 감정 처리용이 아니라 계시전달용입니다. 

 

그런데 나팔이라고 해서 다 같은 나팔이 아닙니다. 어떤 나팔은 잘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좋은 노래만 부르는 나팔이 있습니다. 자신의 기분과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감정처리용으로 나팔이 사용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신 은나팔의 사용목적은 그런 용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전달용으로 나팔을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나팔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전달되고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적 인물들이 바로 이런 기능을 다 한 하나님의 은 나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계시 전달용으로서의 하나님의 은나팔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보내신 하나님의 은나팔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땅에서 어떻게 은나팔로서의 사람을 살고 사명을 이루었는지를 기록한 것이 에스겔서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보내진 하나님의 은나팔이었습니다. 은나팔로서의 사명을 외면하려고 했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그 목적대로 사용하셨습니다. 에스더는 구스 온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은나팔이었습니다. 그 땅에서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크게 외치면서 담대한 믿음으로 은나팔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 보냄 받은 하나님의 은나팔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과 인생이 은덩이적인 것을 넘어서서 은나팔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과 삶의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은나팔을 울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복음, 십자가의 전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에 진정한 하나님의 은나팔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샬롬. 

gsolee@hanmail.net

06.0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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