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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삶, 깊은 삶, 가장 깊은 삶…”

(누가복음 5:1-11, 고린도후서 10:5)
강원근 목사

뉴욕감리교회

1. 들어가는 말: 규범과 표준의 전쟁

오늘날 전세계를 조망해보았을 때 눈에 보이는 현상 중에서 가장 드러나는 것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입니다. 이 무역분쟁 때문에 전세계가 긴장하고 있고 올해의 세계경제 또 우리들의 서민경제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분쟁은 무역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전쟁은 인권, 정치체제, 군사분쟁으로 확대될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어서 상당히 불안해 보입니다. 

미국은 1950년부터 1980년대까지 소련으로부터는 군사적 도전, 일본과 독일로부터는 경제적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도전들을 뿌리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은 중국이 도전장을 내밀고 거세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결국 ‘규범과 질서’의 경쟁입니다. 미국의 규범과 질서가 전 세계의 규범과 질서가 되느냐, 아니면 중국의 규범과 질서가 전 세계의 규범과 질서가 되느냐의 문제를 두고서 치열하게 다투는 것입니다. 그간 세상은 3번에 걸쳐서 전세계를 통일할 만한 규범과 질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칼 막스가 ‘국가’보다는 ‘계급’을 통해서 전 세계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소련이 붕괴함으로써 실패가 증명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도는 이란혁명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통한 세계화입니다. 1979년 압둘라 호메이니에 의해 주도된 이란혁명은 세계인들이 ‘국가’보다는 ‘종교’를 충성의 대상으로 생각하도록 촉구했습니다. 세 번째 시도는 금융과 무역의 자유화 그리고 정보화를 통한 세계화 현상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세계화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의 세계화 현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평가됩니다. 세계화 자체가 좋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대로 세계화가 점점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요한계시록에 이미 예언되어 있는 현상입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는데 적그리스도는 정치/경제적으로 통일된 세상의 정치 지도자이고, 거짓 선지자는 종교적으로 통일된 세상의 종교 지도자 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표면적으로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에서 많은 갈등과 다툼 가운데서도 점점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은 예수님을 구원과 진리의 주체로 믿고 따르는 세력들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세력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큰 충돌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 믿는 자들은 똑바로 깨어서 그 무엇보다도 오직 예수님, 그 예수의 존재를 꼭 붙잡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본문인 고린도후서 10:5은 우리의 모든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앞서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그 어떤 위대한 사상과 철학도 인간의 그 어떠한 엄청난 정치, 경제, 군사적인 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하고, 의지하고, 사모하고, 신뢰하고,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2-23, 마지막 날에 누가 우리를 심판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에게 심판을 맡기신 이유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 예수도 똑 같이 공경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35-36, 온 우주만물이 지금 누구의 손 위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을 적나라하게 믿는 순간 나와 여러분의 세계가 그 차원이 달라질 것으로 믿습니다. 만물이 예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예수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2. 릴케: 얕은 삶, 깊은 삶, 가장 깊은 삶

오스트리아의 시인으로서 20세기 최고의 독일어권 시인이라고 칭송되는 사람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입니다. 독일어로 출판된 철학서적 중에서 가장 읽기 힘든 책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고 보통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하이데거가 자신의 책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철학이라는 것은 릴케가 시적으로 말한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한 것에 다름 아니다.”그만큼 릴케의 사고의 무게가 묵직하다는 것입니다. 

릴케의 어머니는 첫 번째로 얻은 딸에 대한 집착이 컸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 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태어난 자식이 바로 릴케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죽은 딸에 대한 집착 때문에 릴케가 8살이 될 때까지 여자 옷을 입히며, 거의 여자 아이로 키웠다고 합니다. 이런 릴케가 청년이 되어 독일 뮌헨에서 잠시 살다가 살로메라는 러시아 여인에게 감화를 받아서 러시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2번에 걸쳐서 러시아 여행을 했는데 그 여행을 통해서 그의 인생이 얕은 삶에서 깊은 삶으로 변화가 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시베리아의 대 자연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손의 지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자연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 슬리브 민족의 엄청난 가난한 삶을 보면서 왜 그들이 불과 같은 보드카를 마시고, 쉬지 않고 몸을 바르르 떠는 발레 같은 것을 해야 하며,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들으며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인간의 가난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그는 러시아에서 톨스토이를 만남으로 한 인간의 정신이 얼마만큼 위대해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정신조차도 결국은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검은 장막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연애는 그만두고, 오직 신과 가난과 죽음만 말하리라. 얕은 삶을 떠나, 깊은 삶으로, 깊은 삶을 떠나, 더 깊은 삶으로 들어가리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3. 누가복음 5장에 나타난 얕은 삶, 깊은 삶, 더 깊은 삶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을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 또한 얕은 삶, 깊은 삶, 그리고 더 깊은 삶 이 3가지의 삶 중에서 어떤 한 유형의 삶을 선택해야만 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서 우리는 이 3가지 유형의 인생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인 게네사렛 지역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베드로의 배 위에 올라서 호숫가로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설교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신 후에 베드로에게 고기를 많이 잡았냐고 물어보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베드로의 배는 빈 배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베드로의 인생이고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뭔가 얻은 것 같은데, 뭔가 잡은 것 같은데 결국 나에게 남는 것은 허탈함과 염려, 근심, 비교, 섭섭한 마음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릴케가 말한 “얕은 삶” ”빈 배”의 삶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비관적인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고, 베드로가 순종했을 때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졌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바로 기적을 체험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후 우리의 삶에 기적 같이 채워지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이 나서 그것을 간증합니다. 이것이 바로 릴케가 말한 깊은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기독인들은 바로 여기에서 머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또 한 가지의 인생이 나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눅5:11) 예수를 따르는 삶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따르면 베드로가 깊은 곳에서 잡은 고기를 먹었습니까? 본문에 따르면 베드로는 그의 배를 육지에 대자마자 “모든 것을 버려두고” 곧바로 예수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벌어진 기적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인식하도록 도왔던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그 기적의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릴케가 말한 “가장 깊은 삶”입니다.

 

4. 가장 깊은 삶: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삶-바울의 “예수, 예수, 예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 잡혔다는 말입니다. 로마에 가면 바울이 순교한 장소에 ‘트레 폰타나’(Tre Fontana)라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바울은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목이 베이고 나서, 그 목이 바닥에 세 번 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이 튄 자리마다 물이 솟아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수도원을 짓고 그 수도원 이름을 “3개의 분수”라는 뜻으로 ‘트레 폰타나’(Tre Fontana)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의 목이 땅에 떨어진 후 피가 나왔는데, 그 피가 “예수, 예수, 예수”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창세기 4:10이 생각났습니다. 창세기 4:10에서는 하나님께서 동생을 살인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싶어서 외치는 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마지막 소리가 어떤 것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바울은 죽어서 그 자신의 피를 통하여 “예수, 예수, 예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 안에 내 핏속에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존재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리에 또 성경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와 성경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구원과 풍성한 삶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5. 주기도문: 충성하는 자가 있어야 권세가 세워지니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맨 마지막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같이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들입니다. 그런데 나라에는 그 나라를 통치하는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이 있을 때 세워지는 것입니다. 따르는 자들이 없는 왕이나 대통령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왕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은 따르는 자들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따르는 자들을 통하여 왕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완전히 순종하여, 내 자신을 비워서, 내 자신을 예수님께 드릴 때 바로 그 순종과 비움이 하나님 나라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신뢰하여 순종하고 충성하는 자들이 없는데 어떻게 권세가 세워지겠습니까? 오직 우리의 비움과 순종과 충성이 하나님 나라의 기반이 되는 것을 우리는 매일 주기도문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6. 곱셈의 인생으로 발전해 가는 삶

우리 기독인의 인생은 덧셈의 인생이 아니라 곱셈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1+1은 2입니다. 즉, 한 존재가 한 존재를 그저 만나서, 만나고 나서도 여전히 두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만남은 영어로 meet, encounter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는 만남입니다. 나와 예수님의 만남은 이런 만남이 아닙니다. 나와 예수님의 만남은 곱셈의 만남입니다. 1☓1은 1입니다. 이것은 두 존재가 만났는데, 그 두 존재가 완전히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나의 존재와 예수의 존재가 만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5:5, 내 삶에 기적 같은 축복의 삶이 펼쳐지고,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목회가 형통하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딱 중심에 있지 않으면, 오로지 예수만이 나의 믿음의 고백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기껏해야 깊은 삶에 머물 뿐 가장 깊은 삶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먹고 마실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고,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주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 멈추면 안 되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온전한 충성을 드리며, 그 분과 하나가 되어서, 그 예수님을 최고로 영광스럽게 해드릴 수 있도록 우리의 신앙이 발전해 가야할 줄로 믿습니다.

 

7. 결론: 타인을 향해서도 가장 깊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오늘 우리는 가장 깊은 삶을 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가장 깊은 삶을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1886년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위대한 소설에서 죽음을 선고받은 이반 일리치를 찾아온 가족과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만약 이것이 인생이라면 우리가 얼마나 허망합니까? 나를 위해 살고 죽는, 진리 가운데서 정말 함께 가는 그 한 사람만 있어도 우리는 이 땅의 삶이 기쁠 것입니다. 그 진실한 한 사람을 얻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은 깊은 삶에서 가장 깊은 삶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을 향해서는 오직 예수께 충성하심으로 가장 깊은 삶을 살아가고, 땅을 향해서는 함께 하는 믿음의 동역자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장 깊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wok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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