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목사
(밴쿠버 빌라델비아교회)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요3장의 이야기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문이 한 영혼에게 열리는 것이 기록된 장면입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입을 여셔서, 마치 창세기에서 말씀으로 창조하듯이, 한 영혼을 위해 영원한 말씀을 어두움 가운데 나아온 니고데모에게 비추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렇게 주신 첫 계시는 3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입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를 택하심, 대신 죽으심, 의롭다 칭하심 등 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전부 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준비되어지고 실행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도 그 사실 하나의 증거일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완전히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 거듭남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이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구원도 없고, 당연히 그 증거인 성화도 없는데, 이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아기가 태어나듯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께서 기록하신 그의 서신들의 핵심 내용도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이 거듭남에 대해서 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그 누구보다 더 극적인 거듭남을 경험했기에 그렇습니다. 다메섹도상에서 왕 같던 사울이 주님을 만나 극히 작은 자 바울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는 그를 거듭나도록 하신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선포하죠.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들의 내용은, 쉽게 말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직접 계시하신, 영혼의 거듭남에 대한 설명이며 주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놀라운 사실은 내가 거듭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니고데모가 했던 모든 율법과 선행들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 이라는 거예요.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정말 당황할 만 하죠.
이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구원의 핵심인 거듭남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깨달을 때, 두 손 다 들고 주 앞에 나가는 영혼이 될 때, 비로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준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에게 모든 주권이 있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니, 사실은 나는 아주 악한 자이며 그러므로 나는 이제 곧 지옥 갈 수밖에 없다는 이 사실이 내 영에 와 닿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거듭날 수 있는 자로서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내 성질과 죄악된 태도가-여태까지는 교만하게 자랑하던 것들이-이제는 마치 뜨거운 불덩이 같이 느껴져서 그걸 던져버리게 되고 내가 죽고, 그 죄악된 태도와 마음이 씻겨나가며, 그 자리에 거룩한 영으로 채워져서 새롭게 태어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의 인간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니고데모에게 서서히 일어납니다. 그가 주님께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물어보면서, 서서히 자기의 의가 아무 쓸모없으며 죄악으로 가득한 것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그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주님 앞에 간절하게 나올 수 있는, 거듭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갑니다. 이것이 주님과 니고데모의 만남에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니고데모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전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이방인들이 예배드리는 이방인의 뜰에 있던 상인들을 쫒아내어 회복하시죠. 그 때 예루살렘에 왔던 많은 이들이 이 표적을 보고서는 이것은 메시야가 하실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주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라는 거예요.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2절).
니고데모도 주님의 성전 회복을 보고는 놀라서 이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구나! 하고 알았던 사람들 중 하나라는 거죠. 그리고 이 믿음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다만 좋은 선생, 선지자 정도로 치부하는 믿음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했다는 겁니다. 그랬기에 니고데모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밤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믿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싸늘하다는 것 입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24절). 니고데모의 앎과 믿음은 주님이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 그 정도였다는 것이고, 그렇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자들과 니고데모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즉, “니고데모야, 그것으로는 천국 못 간다”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메시야인줄 알고 믿기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거듭나지 않았으니까. 거듭나지 않은 니고데모는 주님께서 자신을 의탁하지 않은 이들과 똑같다는 겁니다.
진짜 거듭난 이들은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의탁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난 이들도 자기 자신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완전히 맡긴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이들에게 주님은 자신의 몸을 의탁하다 못해 심지어 찢어주시고 자신의 피를 나눠주셔서 먹고 마시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들의 영속에 있게 하시며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난 자는 자신을 주님께 완전히 의탁하고, 주님께서는 그의 몸과 피와 영을 의탁하십니다. 그런 주님과 하나 되는 교제가 거듭난 자의 모습이며 믿음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없는 군중과 니고데모-이들의 주님을 메시야로 알고 믿었던 것에는 이런 교제가 일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이런 온전한 교제가 있습니까?
거듭난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나가 된 사람이며, 그 거듭남의 증거는 바로 주님과 이렇게 하나 되어 누리는 교제의 감격과 감사, 그리고 감사에서 나오는 겸손한 순종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기에, 나도 감격하며 감사하며 주를 사랑하며 순종하려고 결심한 모습이 거듭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났는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지 알려면 그 증거를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격, 감사하려면 그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 앞에 누군지, 내가 처절하게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져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을 만나 얘기하면서 이 사실이-바리새인으로 했던 그 모든 것이 아무 소
용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없으며, 자신이 주님에게서 떨어진 것이-그의 영혼에 큰 두려움으로, 큰 짐으로 무겁게 누르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이 주님에게 있는 것을 직감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을 직감하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염치불구하고 주님에게 여쭙기 위해서,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주님 앞에 나옵니다. 이것이 니고데모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군중들은 주님이 메시아인줄 알지만, 바로 이 모습이 없었습니다. 주님께 나오지 않는 이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에게는 희망이 있어요. 주님께 나왔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밤에 왔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주님께 왔지만, 만약 주님을 정말 메시아로 믿는다면 다니엘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떳떳이 주께 나올 텐데, 몰래 왔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가 있는 거예요.
니고데모가 주님앞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께 그의 마음을 열고 찾습니다, 묻습니다, 간절히 구합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니고데모를 바꾸시는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거듭나는 방법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를 보며 우리도 그와 같이 우리 영혼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나의 처절한 모습이 내게 다가오기에, 니고데모처럼 나도 아무도 모르게 주님과 나만이 만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여쭙고자 하는 간절함으로서 주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듭남의 물꼬를 트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계속 주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그렇게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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