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믿는 사람을 신자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상황을 이기고 시험을 이기고 염려와 두려움과 절망을 이기는 사람을 신자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을 보면 신자가 끝까지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믿음의 founder, 곧 ‘설립자’이시고, 또한 믿음의 perfector, 곧 ‘완성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으로 사는 길을 배우고 생각하고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조상들처럼 끝까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이런 시험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세상 가운데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우리가 이처럼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반드시 찾아오는 위기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곤하여 낙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다보면 누구나 지치고 피곤하고 마음이 상할 때가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이런 수고를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쁨으로 했던 사역이었는데 전과 달리 마음에 기쁨이 없고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BURN OUT, 영적 탈진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이 영적 탈진상태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 왜 이처럼 영적으로 탈진하는 상태가 찾아오는 것일까요?
먼저는 영적 전쟁을 육신의 능력으로 싸우려고 하기 때문에 지쳐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적인 순종을 한 것이 아니라 율법적인 순종을 하기 때문에 지쳐버리는 것입니다.
보통 몸과 마음이 지쳐서 우리가 병원을 찾아가면 영양제 주사를 놔준다거나 영양식을 먹고 푹 쉬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에서는 좀 쉬어도 된다는 허락이 없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탈진하는 일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경주를 멈춰도 된다는 허락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은 지쳐죽겠는데도 계속해서 봉사나 사역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일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경주는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지치면 그만 둘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멈추는 순간 사탄의 밥이 되기 때문이며,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사탄의 종이 되어서 다른 사람까지 낙담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율법적인 순종과 복음적인 순종이 어떻게 다른가?입니다.
율법적인 순종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고 선한 일을 행하면 거기에 합당한 보상이나 반대급부가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 받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많이 구제하고 봉사하면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복 받고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귀를 얻는 거구나! 그렇다면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더 복 받고 더 칭찬과 영광을 받겠구나!” 그래서 더 많이 희생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신하면서 자기 의를 증명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탈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복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율법적인 순종을 하는 사람들은 만일 누군가 그 사람의 희생과 수고를 몰라주거나 잘못을 지적하면 그걸 견뎌내지 못합니다.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지치고 상처받고 낙담해서 하기 싫어집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앉아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게 되기 쉽습니다.
셋째, 그렇다면 복음적인 순종이 무엇일까요?
복음적인 순종의 비밀이 3절에 나옵니다.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 곧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먼저 ‘거역’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순종하지 않은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거역’이라는 단어 ἀντιλογία는 영어로 hostility입니다. 적대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셨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를 내어주심으로 인간들에게 없는 의로움을 선물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땅히 예수님을 환영해야 할 유대의 왕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오히려 적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서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선포하셨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백성들을 속이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예수님을 부정한 자로 취급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셨을 때는 귀신의 왕이라고 모함했고 성경에 대해서 탁월하게 해석하셨을 때는 그래봤자 목수의 아들이라고 비웃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낙인찍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 온갖 조롱과 모욕과 거짓과 핍박에 시달리시면서도 끝까지 참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자기를 배신하고 대적한 모든 자들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셨다’는 말씀 안에는 그 모든 대적자들의 악한 죄악을 다 해결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자신을 대적하고 미워하고 핍박하고 침 뱉고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박는 모든 죄인들을 참으시는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순종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어떻게 복음적인 순종을 할 수 있을까요?
먼저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나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죄로 죽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내 행위로 주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앞에 의로움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날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안에서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 성령께서 내가 예수님께 속했다는 것을 확증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 자신의 죄와 그리고 죄의 세력과 싸우는 믿음의 경주에서 우리에게 피 흘림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피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지쳐 떨어져 나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누구나 어떤 치명적인 시험 앞에서 다시 육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갈 때 반드시 먼저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에는 자기 생명까지도 부인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는 믿음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주일마다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힘들게 일하느라 피곤한데 이 좋은 날, 쉬지도 못하고 교회 가서 또 부담스러운 말씀을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 갈등이 있다는 것은 아직 영혼의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영적으로 탈진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내 한 주간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그런 나를 용서하시고 또 다시 받아주시는 그리스도의 한없는 자비와 은혜를 힘입고 또 다시 세상의 유혹과, 자신의 죄성과 맞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일예배는 회개를 통한 영혼의 안식을 얻는 날이며, 회개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또 한 주간을 살아낼 영적 충전을 받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시험에서 무너져 버린다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사람들의 오해나 날 향한 이유 없는 비난이나 조롱을 받을 때, 날 잘 알지도 모르면서 이런 저런 평가를 하고 반대하고 적대하는 것을 당할 때, 그 괴로움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21장 13절을 보면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각오를 갖고 있어야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참으셨을 때, 사탄은 자신이 이긴 것으로 알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군가와 세상에서 경쟁하다가 예수님 때문에 내가 포기하면, 세상은 우리가 졌다고 조롱하겠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이겼다고 손을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어지고 지치고 맘 상했을 때,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리기까지 참으시며 고난을 당하셨지만 마침내 승리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닥치는 오늘의 고난과 징계를 견뎌냅시다. 우리 모두 마침내 이 영적 싸움의 최후 승리자가 될 것을 믿으면서 힘을 얻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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