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장로교회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 그 말만 들어도 가슴에 찡함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라는 단어는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까?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가슴 벅찬 그리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어머니 하고 불러보게 됩니다.
‘고향’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릴 적에 뛰어놀던 고향의 풍경이 떠오르면서 그리움이 사무쳐 옵니다. 지금은 찾아가도 낯선 타향처럼 변해버린 고향이지만 어릴 적 뛰놀던 고향에 대한 향수는 잊혀 지지 않습니다. 전에 독일에서 녹화한 가요무대를 시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독일 교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가수들이 나와서 고향을 소재로 한 노래들을 부르는데 방청객들은 모두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펑펑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향은 그렇게 애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하나 ‘조국’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물론 한 번도 고향을 떠나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고향이나 조국이란 단어는 그리 큰 감동을 주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조국은 영원한 로망이요 그리움입니다. 일제치하 조국을 떠나 만주에서 중국에서 미국에서 러시아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에게 조국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일본에 살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국한 시인 이상화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노래했습니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중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그가 26세때 개벽지에 발표한 시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바라던 조국이 해방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애국자들이 조국의 해방을 갈망하며 눈을 감았는지요. 가난한 나라. 자원도 없는 나라. 보리 고개를 넘기가 너무도 힘들었던 나라. 일제의 압박, 6,25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나라. 그런데 그렇게 가난하고 배고프던 나라가 지금은 세계 경제 10위권에 드는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일어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다음엔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고 전 국민이 열심히 땀 흘려 일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를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낸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으신 분이고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을 지독한 가난에서 구해낸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현재 한국이 세계에서 1위인 것들이 많습니다. 반도체 생산, 선박 건조율, 제철 조강 생산량, 스마트 폰, 인터넷 보급률, LCD Led TV, 지하철, 국제공항, 여자 골프, 교육열, 쇼트랙 양궁 바둑 등등... 불과 반세기 만에 대한민국은 신생국(新生國) 중 유일하게 발전하여 경제대국이 되고 민주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발전은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너무도 암울한 소식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금년 3월 1일은 3.1절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 천도교인이 15명 그리고 불교인이 2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모두 일본 경찰에 체포당하고 재판에 넘겨서 몇 년씩 형을 살았습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7천여 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3.1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무엇보다도 조국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어려운 조국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비록 포로로 잡혀간 곳이지만 페르시아의 수산궁에서 높은 지위를 갖고 편안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조국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제 하나니가 왔을 때 그는 예루살렘에 관한 소식을 물었습니다. 하나니는 예루살렘이 극심한 환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은 불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슬피 울었습니다. 수일 동안을 슬픔 속에 지냈습니다. 그는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 먼저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아버지 집이 범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현재 들려오는 조국의 소식은 우리를 너무도 암담하게 합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조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문제가 많습니다. 지난 100년간 중진국을 지나 선진화에 확실하게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입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포르투갈 체코 등 많은 나라가 중진국에서 선진국에 진입하려다가 주저앉았습니다. 중진국까지는 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중진국에서 선진국에 들어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1890년대에 이탈리아와 아일랜드에 살던 농민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왔습니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북미에 있는 미국으로 갈까? 아니면 남미에 있는 아르헨티나로 갈까? 당시 두 나라 모두 빠르게 성장하는 젊고 역동적인 경제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국력이 세계 10강 안에 드는 나라로 프랑스보다도 더 잘 살았습니다. 미국과는 어느 나라 미래가 더 밝은가를 경쟁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르헨티나로 갔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르헨티나와 미국 중 어느 나라로 이민을 갈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일인당 GDP는 1만4000달러로 세계 60위입니다. 아르헨티나와 경쟁하던 미국은 6만2000달러 수준이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난 것일까요? 어느 전문가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데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복지 포퓰리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포퓰리즘이란 대중의 뜻을 따르는 정치행태로 대중주의 민중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망가져 급증한 도산과 실업을 '퍼주기식' 복지정책으로 해결하려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정치와 경제를 고치려 않고 무상교육·무상의료 등을 약속하며 노동자와 빈민들의 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국가재정이 파탄 나고 국가부도 때문에 수차례 IMF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지금 내란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남미의 베네수엘라 역시 복지 포퓰리즘으로 국가재정이 파탄 난 상태입니다. 국가적으로 선진국이 되려면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덫에 걸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리스가 그랬고 한국이 복지 포퓰리즘'의 덫에 걸려 있습니다.
한국의 복지 포퓰리즘은 與野(여야)가 따로 없습니다. 복지 포풀리즘은 나라가 망하는 길인데도 여당과 야당이 합세해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은 근로의욕이 상실(喪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聖經)에도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일 하지 않는 자에게 마구 퍼주고 있습니다. 북한에 퍼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일하는 자만 바보가 됩니다. 이것을 고상한 말로 "무상복지"라고 합니다. 무상복지는 나라가 망해가는 길입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그리스가 그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느헤미야가 조국의 참상을 듣고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 한국의 사태를 깊이 알게 되면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면서 조국을 파멸에 빠뜨리려는 세력들이 사라져 조국이 새롭게 발전하기를 바라는 눈물이 가슴에 흘러야 하겠습니다. 조국을 멀리 떠나서 우리는 외로움과 설움 때문에 울 수 있습니다. 이민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울 수도 있습니다. 그 눈물도 무의미한 눈물은 아닙니다. 그 눈물 때문에 훗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처럼 조국을 사랑하기에 조국을 위해 안타까움을 느끼며 슬픔을 겪어야 합니다. 그 때 흘리는 눈물, 그것은 더욱 가치 있는 눈물이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의 참상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의 무너진 성벽과 성문을 다시 세우리라는 계획을 갖고 왕의 허락을 받아 조국에 갑니다. 그리고 숱한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성벽 재건을 완성합니다. 그것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냈고 조국의 명예를 높였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6.25 전쟁에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이나, 전쟁의 폐허 속에서 짧은 기간에 오늘 저렇게 발전한 것은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기도가 있었고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울며 맨발로 피난을 가는 길에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무서운 소식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짧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아히도벨은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막힌 모략을 압살롬에게 말했습니다.
그 당시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말대로 했으면 다윗은 꼼짝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후새에게도 들어보자고 했고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더 낫다고 하며 후새의 모략을 채택했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다윗이 다급할 때 했던 짧은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기도도 들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수히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일하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일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시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가 조국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 중에 기도만큼 값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조국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상시에는 비상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의 조국인 한국은 비상시입니다. 2차 미북정상회담이 어떻게 한반도 문제에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에 계획을 세운다 해도 일의 결정을 하나님께 있습니다.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조국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도제목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국가지도자들의 지혜와 통치력을 위해, 국민들의 깨어있음을 위해, 한국 교회의 자성을 위해 등등,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구하는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주여 우리 조국 한국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조국을 불쌍히 여기사 지켜 주시옵소서.”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조국 한국이 위기를 벗어나 다시금 힘차게 발전하고 성장해 나가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taekwonkoh@hotmail.com
02.2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