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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법칙

(잠언 2장 1-8절)

장성철 목사 (보스턴장로교회)

사회심리학자 토마스 길로비치(Thomas Gilovich)는 인간에게 처음에 가졌던 선입관이나 신념을 뒷받침 하는 정보는 중요시하고 반대되는 의미의 정보는 무시하려는 ‘편향 확증(confirmation-bias)’이란 심리적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성경의 말씀보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 특히 과학적, 합리적 논리가 마음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성과 논리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면 크게 부정하지 않지만, 무시하는 “편향 확증”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혜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의 영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에게 나타내신바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다고 말씀합니다. 과학적인 지식에 근거한 지혜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초자연적인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인생은 절망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 또한 영원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신령한 지혜로 우리의 잘못된 자아와 이해가 깨어지고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6절).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닌 것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입니다. 반면에 위로부터 난 하늘의 신령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약3:15,17). 하나님은 이런 영적인 지혜를 선물로 풍성하게 주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합니다(1:5). ‘부족하다’는 의미는 ‘빈곤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고전1:21). 헬라인은 철학적 지혜를 가지고, 유대인은 사물을 관찰하는 과학적인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을 하지만 하늘의 신령한 지혜가 없이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빈곤한 것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 빈곤을 느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서 영적 계시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영적 성장을 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고전2:6). 어린 아이에 대조하며 온전한 자는 성장한 어른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지혜를 주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지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풍족하게 우리를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신령한 지혜를 찾고, 붙잡아야 합니다. 신령한 지혜의 선물에 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혜를 붙잡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본문에 나온 4쌍의 8가지 동사는 우리에게 위로부터 오는 신령한 지혜를 어떻게 붙잡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없이 받고 간직해야 합니다. “나의 말을 받으며”(1절). 하나님은 야훼,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출3:14).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그대로 받아야 하고, 또 그저 받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3:16).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나있습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회개하는 마음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감사하는 마음이 하늘의 지혜를 받는 첫 단계입니다. 이러한 회개와 감사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잠1:7).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1절).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주일마다, 매일 같이 인터넷 설교, 설교 CD, 설교집들을 통하여 보고 듣고 있지만 금방 잊어버리는 “영적 치매”에 걸려있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약1:22-24).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대로 행하지 못한다면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거대한 벽을 쌓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2절). 원어적 의미는 “귀를 날카롭게 하며”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꼭 붙잡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게 되면 귀를 “쫑긋하고” 듣고, 따라 행합니다. 반면에 존경심이 없으면 ‘당신은 떠들어라’하면서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2절). 신령한 지혜를 구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을 명철에 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 가운데 적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을 압박해오는 문제의 대부분은 신령한 지혜가 아니면 대처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삶을 복음의 원리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환란과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환란과 고통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알고 이겨낼 힘을 달라고 지혜롭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을 얻으려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식을 불러 구하며”(3절). 순간마다 새로운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불러 구하라’는 것은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한 것은 받은 줄 믿으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혜는 자동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이 아니라 자녀로 대하십니다. 자녀가 물어 보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특권’을 사용할 때 하나님은 후하게 주십니다.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3절). 명철은 지혜에 큰 힘을 실어줍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고전14:20). ‘영적 저능아’만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영적인 저능아란 지혜에 있어서 어린 아이의 상태를 벋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영적 성장과 명철은 아이와 같이 움추린 신앙으로부터 어깨를 펴고 두 손을 움켜쥔 확신에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4절).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는 연구자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마치 인생에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열심으로 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경험이 많은 세관원이 여행자의 가방에 감추어진 물건을 찾으려고 플래시라이트를 비추이는 것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에 깊이 감추어진 보화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하시는 빛으로 찾으려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연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벧후3:18).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4절). 하나님의 지혜를 붙잡는 것의 최고 절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보물을 안전히 보관하기 위하여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보물을 다시 찾기 위하여 지도나 땅과 나무에 일정한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다시 찾기 위해서 부지런하게, 인내하며, 끈질긴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말씀과 새로운 깨달음을 메모해 놓은 것을 다시 보며 기억에서 희미해 진 것들을 다시 추적하여 묵상하고 마음에 새롭게 두어야 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에 목적이 있습니다. 지혜 없이 지식을 가질 수는 있지만, 지식이 없이 지혜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신령한 지혜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신령한 지혜는 최고의 선생이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배워야합니다. 주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합니다(마11:29). 주님께 배울 때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이 구원자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7절). ‘완전한 지혜’의 의미를 NIV성경에서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승리를 예비하셨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의 승리는 죄로부터 구원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철학적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었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십니다.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임을 알게 해줍니다. “여호와는…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7절).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힘에 대하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창15:1, 시33:20, 84:11,시 89:18).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순간마다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벧전1:5). 우리는 온갖 위험과 죄로 오염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살아남을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세상에 가득한 파괴적인 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옛부터 인간은 지혜를 구하고 찾아왔습니다.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필요한 지식은 암기하는 정보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입니다. 현학적인 수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의 메시지! 빈틈없는 논리가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질 공간! 사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자유하게 합니다! “느낀다. 그러므로 존재한다”(Sentio ergo sum).

필요한 지식은 엄격히 구분하는 잣대가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이해입니다. 율법보다 십자가의 은혜! 말하는 쪽의 입이 아니라 듣는 쪽의 귀입니다. 마음의 묵상을 말합니다. 책의 깨알 같은 글씨가 아니라 책을 쥔 손에 맺힌 작은 땀방울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머리를 높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을 닮아가는 지혜! 신령한 지혜의 궁극적인 목적은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자와 보호자임을 알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온전한 지식에 이를 때까지 열심히 위로부터 오는 신령한 지혜를 구하고, 찾고, 또 다시 찾아가면서 마음에 간직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schang@boston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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