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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부활의 소망

(요한복음 11장 25절-26절)

노기송 목사 (뉴욕 새시대교회)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는 있어도 죽는 순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든 죽음을 맞이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 죽음이 어떤 형태로, 언제 다가오든 자기의 운명이 다한 사람은 마지막 호흡이 정지되면 이 세상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 죽음이 언제 내게 올지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그 죽음이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죽음을 의례 겪는 한 인생의 여정으로 알아 담담히 맞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에게 다가온 죽음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특별히 교회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죽은 사람과 예수님을 안 믿고 죽은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확연히 다릅니다. 목사로서 그런 죽음의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참 소망이 있는 것과 없는 차이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두 주 사이에 두 번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한분은 저희 작은 아버님이시고, 또 한 분은 저희 교단 같은 지방회에서 함께 사역을 했던 이선일 목사님이십니다.

저희 작은아버님께서 75세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 달 전 병원에서 뵐 때, 마지막 인사가 “삼춘 내일 뵈요”, “그래 내일 보자” 한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폐렴이 심해 제가 떠난 후 그 다음 날 아침 바로 인공호흡기를 끼고 계시다가 그 길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신 것 입니다. 저는 그래도 마지막 인사라도 했지만 맨하탄에 살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은, 아빠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보내드리게 되어 매일매일 안타까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라는 말도, “아빠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2주가 지나자 병원에서는 이제 의학적으로는 가망이 없으니 가족들이 결정을 하라고 마지막 통보를 했습니다. 사실 가족으로서는 제일 힘든 결정입니다. 그래도 다시 회생할 수 있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포기하라는 담당의사의 말씀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며칠 간 통곡을 하며 생각하다가, 그래도 하루라도 편하게 보내드리는 것이 낫다는 마음을 갖고 숙모님과 딸이 결정을 하여 싸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라 바로 현실의 슬픔과 아픔을 믿음으로 이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얼굴이 밝아지면서 의식도 없는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찬송을 들려드리며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죽음이 다가 아니고 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합니다.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나기 때문에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자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아주 평안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재림장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지금의 죽음이 끝이 아니요 이다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분, 1990년도에 도미하여 뉴욕안디옥침례교회를 26년간 섬기셨던 이선일 목사님은 아직도 한참 일할 나이인 오십대 중반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참으로 형용할 수 없이 안타까운 장례식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25세에 목사안수를 받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오직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온힘을 다하여 최선으로 헌신하며 달려온 신실하신 목사님이시기에 더더욱 안타까움이 더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유족들을 통하여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안타까운 분이 너무 일찍 가셔서 우리가 그 유족들을 위로해 드려야 할 텐데, 이번 장례식 내내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유족들을 통하여 은혜와 믿음과 부활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올 1월에 비염으로 시작하여 림프 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부르시는 그 날까지 암과의 투쟁은 눈물이 날 정도로 처절했습니다. 그러나 병문안을 갈 때마다 항상 웃으며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지난 금요일 아침에 부친 되시는 목사님과 통화 중에 우리 아들이 오늘을 못 넘길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 급히 병원에 계신 사모님께 전화를 해보니 지금 마지막 숨을 쉬고 계시다며 임종기도를 부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임종기도를 해드리면서도 그렇게 빨리 임종이 올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병원에서는 앞으로 6개월은 산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주일 저녁에 지방회 임원들이 사모님과 두 딸들을 위로하러 교회와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사모님과 두 딸이 얼마나 믿음으로 굳건히 서있는지 오히려 그들을 보는 저희가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빠가 암 투병을 할 때는 그렇게 울며 기도하며 매달리더니, 막상 하나님께서 불러 가심을 확신하고 나서는 그 슬픔과 괴로움의 현실을 믿음과 부활의 소망으로 이겨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지방회장으로 장례식을 준비하는 회장님께 부친 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시어, 장례식이 너무 슬프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시었습니다. 내 아들이 이제는 천국에 주님의 품에 안기었으니, 기쁨의 장례식이 되게 해달라는 특별 부탁이셨습니다. 그리고 장례식 내내 온 유족들이 밝은 얼굴로 조문객들을 맞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천국환송예배였습니다.

이렇게 최근 두 번의 장례식을 하면서 또다시 깨닫는 것은, 인생의 호흡은 오로지 하나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어느 누구든 언제든지 가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죽음이 닥쳐왔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물질도 권력도 명예도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필요가 없고 오직 창조주시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죄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 모두 유족들과도 장례식 내내 웃음으로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장례식을 마칠 수 있는 것도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죽음의 현실 앞에서 슬퍼하며 좌절하고 통탄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부활의 생명을 받아, 죽어도 다시 사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똑같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그 영의 힘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입니다.

그 내용이 로마서 8장 11절에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채드릭 목사님은 “성령이 없는 기독교는 소망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령으로 시작하였기에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슬프고 괴로운 현실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기시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고 진정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1장 25절-26절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까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멘! 믿습니다! 할렐루야! 오직 예수! 성령 충만! 마라나타! rhokisong@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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