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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에 대한 세상의 불관용에 대하여

- 늙는 것이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세월은 흐르게 되어 있다 -

교회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생각들을 목회에 집중하다보면 직업병(?)처럼 관련성 여부에 따라 취미와 기호도 확연히 바뀌는 것을 본다. 독서에 있어서 더욱 그러한데, 지금은 거의 그런 책은 엄두도 못내지만 고교시절 서점에서 한권씩 사보던 책이 당시 연세대 교수로 있던 김형석 교수의 수필집이었다. 지금도 영혼의 샘물을 길어 올리던 그 책의 제목들을 기억한다. 그는 1920년생이니, 거의 100세에 가까운 연수를 사시는데 최근에도 책을 펴냈다. 출간과 함께 그가 하는 말은, “늙는 것은 내 잘못은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세월은 흐르게 돼 있다”는 말이 인터뷰 기사로 소개되었다. 덧붙여 “60대에도 공부하며 일하는 사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강제징용과 한국사의 여러 갈래를 다 지나면서도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이 아닌, 늙음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그의 삶을 대하는 자세가 경이롭기만 하다.

그리스도안에 빛나는 늙음의 미학 이처럼 김형석 교수와 같은 특별한 은총을 받은 노학자의 빛나는 늙음이 있는 반면, 지난여름 한국 방문시 듣게 된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부모를 홀대한 불효자에게 증여받은 집을 반환하라고 법원이 판결한 일에 대한 것이었다. 증여 조건으로 부모를 충실히 부양하겠단 각서, 이른바 효도계약서를 근거로 부모가 재산반환을 요청했고 법원이 부모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재산 물려줄 테니 자식들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해달라는 조건이란다. 가장 많이 들어가는 항목이 정기적인 방문, 즉 찾아오라는 것이었고, 다음으로 큰 병 걸렸을 때 병원비 내라는 등의 비상시 목돈 지급, 세 번째가 용돈을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부모 자식 간에 이런 계약서를 쓴다는 게 씁쓸하지만, 기왕에 쓰기로 했다면 최대한 구체적으로 쓸 것을 요청하는 방송이었다. 그리고 효도계약서를 쓰는 방법을 꼼꼼히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기본적인 관계를 따지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버렸다는 안타까운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늙음에 대한 두려움과 보호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배어나오는 시대, 이젠 그 시대를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필연적인 대안을 해법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정면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불효에 대한 성경적인 언어를 말하기 전에, 과연 이 시대의 사상은 늙음에 대해 이토록 불관용하다는 말인가를 고민해본다. 김형석 교수의 말대로, 과연 늙음이 잘못인 것처럼 두려움으로 맞이해야 하는 시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인생은 그저 푸른 청춘이어야만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다. 봄의 꽃향기와 여름의 실록만큼 가을의 단풍도 아름답고 겨울나무 사이의 연가도 아름다운 법이지 않은가? 성경도 그런 늙음의 아름다운 미학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빛이 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복된 지혜와 늙음의 향기 최근 본 교회 유일한 공식적 연령별 모임인 65세 이상의 노인 어르신들이 식사를 겸한 회의로 사택에서 모일 기회가 있었다. 30여명 가까운 어른들이 남녀유별(?)하게 나뉘어서 이런 저런 나누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고 이를 지켜보는 기회가 있었다. 짧은 식사와 회의의 시간이었지만 아주 가까이서 늙음의 아름다움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함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민사회를 살고 계신 어르신들도 한국에 비해서 교육이나 여건이 향상된 어르신들임에도, 이미 자신들의 늙음이 자녀와 젊은 세대들에게 행여 거침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그들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이야기는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되기도 했었다. 회의는 당신들이 교회에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기우와 언젠가 누구나 한번은 홀아비 되고 과부가 되어야 할 터인데 그 순간에 대한 두려움과 이를 믿음으로 이겨내려는 의지가 상반되이 비쳐지는 발언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이를 구체적인 열매로 드러내기 위해서 교회에 어쩌든지 도움이 될 일을 하자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모은 종자돈 회비를 가지고서 교회 안에서 기관 사업을 논의하는데, 마치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가 처음 학급회의를 하듯이 아주 진지하게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이었다.

올해 들어 교회에서 친교재정을 줄이게 되어 부담스러운 음식준비를 위해 손수 김치를 직접 만들어 무상공급하고, 일전의 교회 차량 주차사고가 있어서 주차장 버팀목을 구해서 비치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현재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석 식사자리를 별도로 마련해 음식을 배식해 드리는 게 못내 미안해서 식사시간에 줄을 서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만큼은 참견하며 자라나는 젊은 사람들에의 교육적인 가르침과 배식시간을 실제로 줄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만류하게 되었다.

늙음과 어른스러워짐 어르신들을 보면 부모님 생각에 마음에 심쿵한 울림을 느끼게 된다. 더불어, 가만히 있어도 세월은 흐르게 되어 있고, 늙음은 필연적임은 성경의 진리가 아닌가? 이제는 이 가엾은 세월이 지나면 누구에게나 이분들과 같이 늙음의 시간이 찾아올 터인데, 나는 어찌 그날을 맞이할는지 생각도 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나는 과연 이분들처럼 주님과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어른스러움으로 늙음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예전에는 선배 목사님들만 보고 따라가고 열심히 안부전화만 드리면 되던 것이 이제는 후배목사님들에게도 일정하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들을 감당해야 함을 보게 된다. 부모가 된다는 것도 양육의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자식들이 나를 어떤 아버지로 기억할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저런 잔소리꾼으로 아빠를 기억하지는 않을지 내심 걱정이 된다. 그래서 집에서 편하게 입고 말하고 생활하던 것도 조금은 절제가 되는 것을 느낀다. 부모 자식뿐이겠는가? 성도들이 생각하는 목사로서의 나를 생각해봐도 상당한 고민에 이르게 됨을 본다. 만족할만한 점수를 줄 수가 없기에, 예상찮은 두통이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옛 어른들이 선배가 있고, 스승이 있고, 부모가 계실 때를 사는 것이 복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결국, 철든 어른이 된다는 것, 아름다운 늙음을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말 아니겠는가?

뿌리 깊은 백향목의 향기같이 이처럼 복된 어른되기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교회 안에서 곱게 연세 드신 어르신들을 보면 그 늙음이 너무 좋아서 만족한 행복을 느낀다. 어르신들을 생각할수록 마음이 참 좋다. 목회의 큰 기쁨을 주시는 가장 변함없는 지원군들이다. 새벽마다 항상 한결같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좋다 싫다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시는 권사님들. 대화가 막히고 마음이 답답할 때, 어르신들을 청해서 식사하면 격려와 평안한 위로가 충만해짐을 느낀다. 아무런 사견도 없으시고, 그저 삶에 연륜 속에 묻어난 감사와 배려의 향기가 다가올 따름이다. 젊은 목사의 연약함이 보일 텐데도 목사라고 내내 겸손함을 보여주신다. 마치, 깊은 뿌리를 내린 백향목의 향기처럼 교회를 복되게 세우는 향기 나는 거룩한 주의 성전의 큰 재목 같은 느낌을 받는다. 기도 외에 달리 더해 드릴 것이 없지만, 감사 감사를 노래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과 무엇보다 날로 쇠약해져가는 육신을 바라보는 마음의 어려움도 있으실 텐데, 어르신들의 섬김과 배려에 교회가 한없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우리 모두도 저 어르신의 연세에 반드시 이를 날이 올 터인데, 그때 그 누군가도 젊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예찬을 드릴 대상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요람에서 천국까지 교회에서 더불어, 교회에서 그 늙음의 시간들을 행복하게 가질 수 있도록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성장을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2세들과 EM 프로그램들을 기본으로 열심히 준비하는데 비해 어르신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규모 있는 교회들을 제외하고는 불비함을 보게 된다. 모든 생명의 시간이 중요하지만 그 절박함의 시점에서 본다면, 연세 드신 어른들을 향한 영적생활을 잘 하시도록 섬기고 준비하는 일이 더욱 시급함을 보게 된다. 젊은 사람이 많아서 역동적이고 힘이 있다고 쉽게 말하지만 오히려 교회의 은혜를 지키고 기도시간과 예배시간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아오는 이들은 연세 드신 분들이지 않은가? 외려 그런 분들의 기도의 헌신을 통해서 젊은 세대가 지혜가운데 삶을 경영하는 것 아니겠는가? 교회는 어린아이들의 요람에서부터 어르신들의 천국입성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넉넉한 영적환경을 준비함을 고민해야 하리라 본다. 대개 이민사회에서의 어른들은 마지막 시간을 양로원으로 생각한다. 필자가 섬기는 중소도시에서는 그러한 시설이 부족하기에, 대도시에서 한국 사람들이 모인 규모 있는 양로원에서 즐거운 프로그램의 혜택가운데 삶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교회가 세상 멀리 타국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왜 같은 피부 같은 민족, 게다가 한 교회에서 평생을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기도하고 충성한 일꾼들을 마지막 순간을 낯선 세상 문화 속에서 맞이하도록 해야 한단 말인가?하는 것이다.

늙음에 대한 존중은 축복의 통로 예전에 교회가 고아원의 아이들을 나누어 입양한다면 한국의 고아원은 없어지고 아이들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복되게 자라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국가도 퇴역군인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삶의 마지막까지 그 영광스러움을 지키도록 돕는 것을 본다. 교회는 어른신들의 늙음의 아름다움이 교회 안에서 빛날 수 있도록 돕고 섬겨야 한다. 더 나아가 책임을 질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영광스러움이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 묻힐 곳과 나의 장례위원장 목사님이 누가 될 지가 분명하고, 나의 천국환송예배에 울려 퍼질 찬양의 소리가 선명한 사람만큼 가장 영화로운 인생의 복을 누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늘날 자신의 낳은 부모마저도 멱살을 잡고, 거역하며 살인하는 말세의 때에 남의 부모를 섬겨야 하고 돌보자하면 정신없는 사람취급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사람, 교회의 사람으로서 영혼에 대한 간절함과 사랑이 있다면 결코 부모세대에 대한 섬김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무엇보다 늙음에 대해 긍휼과 관용이 없는 그 자신도 반드시 늙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도 언젠가는 말할 것이다. ‘늙음이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더불어 늙음에 대한 존중은 성경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 가정이 가문이 교회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다. 할렐루야!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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