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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보이지 않을 때

(삼하 15:13-30)

최해근 목사 (몽고메리교회)

2016년을 시작한지 벌써 한 달을 훌쩍 넘기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새해가 시작될 때면 전혀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것들을 갈망하곤 합니다. 예컨대 ‘올해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하나도 없을 거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그러한 바람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해의 벽두(劈頭)에 서서 대담하게 우리 앞에 찾아올 환난이나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방법을 찾고 삶의 걸음을 걷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걸음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정말 앞길이 보이지 않는 큰 아픔이나 위기의 상황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그 때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진리를 보여주고 계시는지 찾아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윗과 압살롬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대항하여 반역을 시도하였고, 그 반역을 피해 아버지인 다윗은 신하들을 동행하고 피난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 다윗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길이 보이지 않는 참담한 상황 속에 떨어진 것입니다. 아들의 칼을 피해 아버지가 도망을 가야하는 극단적인 패륜(敗倫)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가장 귀한 삶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가슴 아픈 일이 우리 앞에 찾아왔을 때 위대한 믿음의 사람 ‘다윗’은 어떻게 그 위기를 풀어가고 있는지 조용히 옷깃을 여미고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1.하나님의 음성을 찾으라. 2016년 한 해의 걸음을 걸어가면서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길이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통해 울려 퍼지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길에 오를 때 제사장 사독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따라 나섭니다. 하나님의 임재(臨在)의 상징이며 백성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되었던 언약궤를 사독은 다윗이 피난 가는 길에 동행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언약궤가 있어야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더 다윗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도로 메어가도록 명령을 합니다. 그 성은 반역자인 압살롬이 차지하게 될 곳이며 오히려 반역자인 압살롬에게 더 큰 힘이 쏠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원래의 자리로 돌리며 오히려 간절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삼하15:26). 언약궤를 성으로 돌려보내었던 다윗은 피난 노정에서 시므이라는 사울 집안사람으로부터 지독한 저주의 말을 듣습니다(삼하16:7). 현장에 있었던 다윗의 조카 중 한 사람이 단 칼에 시므이를 처단하려고 요청하지만 다윗은 강하게 거부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시므이의 입을 통해 다윗 자신이 들어야할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삼하16:11). 앞이 보이지 않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물(聖物)을 이용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을 내려놓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다윗! 가장 치욕스러운 저주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다윗! 바로 이 모습이 다윗의 가장 다윗다운 모습이며 2016년 한 해 동안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가 배워야할 아름다운 영적인 자세입니다.

2.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라. 위기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찾아 나설 때, 그 삶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삶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우리가 취해야할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찾아가기 시작할 때 서서히 우리 앞의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반역을 도모했던 압살롬 일당을 평정(平定)하기 위해 출발하던 군사들과 지휘관들에게 특별히 부탁의 말을 합니다(삼하18:5). 바로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주라는 것입니다. 즉 압살롬을 죽이지 말고 꼭 살려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 요압이 중심이 된 일단의 사람들이 압살롬을 비참하게 도륙하게 됩니다(삼하18:14). 그렇게 해서 반역자 압살롬이 죽음으로써 정변은 끝이 나게 됩니다. 다윗은 정변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지만 그의 최고 관심사는 아들 압살롬의 생존여부였습니다. 압살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압살롬은 정변의 승리감보다는 아들을 잃은 아픔과 회한(悔恨)으로 인해 몸부림치게 됩니다.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을 연거푸 부르면서 통곡을 합니다. 왜 다윗은 이토록 깊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을까요? 자신을 죽이려고 정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서 피난을 떠날 때 궁궐에 남겨 두었던 후궁들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성적인 희롱과 폭행을 했던 인물이며 패륜아(悖倫兒)인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왜 이렇게 울부짖고 있을까요?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 속에서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찾아간 것입니다. 왜 압살롬이 이런 패악한 짓을 아버지인 자신에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인 나는 어떤 모습인가? 곰곰이 자신을 돌아볼 때, 다윗은 자신의 삶에 녹아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충성스런 신하였던 우리야의 아내를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신하를 최대한 사람들이 모르게 자연스럽게 죽이기 위해 자신이 사용할 수 있었던 모든 인맥을 이용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정하고 부정직한 자신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 자신은 그런 엄청난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았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용서와 치유함을 받았던 다윗 자신은 정작 아들 압살롬의 허물을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가 오늘의 비참한 현실을 만든 것입니다. 오래 전 압살롬은 자신의 친 여동생이 이복(異腹)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그런 뼈 아른 사건을 만났습니다. 그 사건을 보고받았던 아버지 다윗은 성폭행의 당사자였던 암논에게 아무런 징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친 여동생의 아픔을 가슴에 품은 채 2년 동안 복수의 계획을 세워 이복 형 암논을 살해하게 됩니다. 형을 살해한 후 압살롬은 타국에 있는 외가로 도망가서 여러 해 동안 머물다가 겨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였던 다윗과의 교제는 끊어지게 됩니다. 아버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이 압살롬의 삶에 깊은 상처가 되고, 결국 아버지를 대항하여 반역을 시도하는 패륜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그런 모든 지난날 자신의 깨어진 삶과 아들 압살롬의 가슴에 남겨져 있는 상처들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따뜻한 용서와 관용의 마음을 회복해가기 시작합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회복되면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그토록 아파하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자신이 조금만 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아들 압살롬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였더라면 오늘과 같은 그런 비참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아! 결국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아비가 된 다윗의 옹졸함과 자존심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자신을 받아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베풀지 못한 아픔이 다윗으로 하여금 더 깊은 아픔 속으로 젖어들게 하는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찾고, 그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회복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우리 앞의 길은 우리를 막고 있는 장애물이 아니라 평평대로(平平大路)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한 해의 첫 걸음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분명히 이 한 해에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와 아픔의 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위기와 아픔의 시간이 우리를 급습(急襲)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먼저 찾고 그 하나님의 음성이 가져오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될 때,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는 주눅들지 않고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 감사하며 뚫고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이 한 해를 채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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