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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심판과 예수님의 분별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노기송 목사 (새시대교회)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그 심판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25장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마지막 사역인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세 가지로 천국 가는 사람들의 자격을 말씀하셨습니다. 1절부터 13절은 열 처녀 비유로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버림을 받습니다. 14절부터 30절 말씀은 재능대로 나눠준 달란트 사용에 그 충성한 결과에 따라 천국에 올라가고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지옥에 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양과 염소를 분별하여 양들은 영생하는 천국에 가고, 염소들은 영벌에 처하는 지옥에 가는 말씀입니다.

26장부터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이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가롯 유다를 앞세운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아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신 후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런 면에서 마태복음 25장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하신 모든 천국 말씀의 마지막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간다고 하는데 마태복음 25장은 믿음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작은 기름을 준비했느냐, 작은 일에 충성했느냐, 작은 자 하나에게 관심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부터 24장까지 예수님은 줄곧 천국에 가는 믿음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즉 이제는 그 믿음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 언제든지 예수님이 다시 오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삶에 현장에서 빛과 소금으로 열매를 맺고 나타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마5:13-16).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는 심판은 산상수훈 결론으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는 말씀에, 순종하고 살았느냐 순종 안하고 살았느냐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요6:40). 그 믿음은 어떻게 증명이 되나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22:37-40)으로 나타납니다. 그 이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는 ‘작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심판하는 대상으로 주목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악행을 일삼은 자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소극적으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소극적으로 불순종하여 게으르고 태만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믿음 없이 기름을 준비하는 일에 태만히 하였던 결과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믿음 없이 그 돈을 땅에 묻어두고 아무 일도 행치 않았기 때문에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고, 그리고 오늘 본문의 염소의 무리로 분별된 자들도 믿음 없이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살다가 영영한 불에 던지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믿음으로 살지 않고 소극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는 무사안일주의 내지는 부작위의 죄가 얼마나 엄중하게 다스려지는 가를 밝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아교회에 책망하신,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4:16)는 무서운 결과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는 뜨겁게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불의와 불법에는 차갑고 냉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의 문제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데 있습니다. 양도 아니고 염소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양 같은데 세상 밖에 나가서는 염소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자기의 불쌍함을 봐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하면서, 밖에 나가서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조차 없는 것입니다. 누가 주리고 목마른 자인지, 누가 벗었고 병들었는지, 누가 나그네 되고 옥에 갇혀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안 갖습니다. 그야말로 불쌍한 작은 자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무사안일하게 삽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불쌍한 인간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알고 믿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양도 자기가 한 일을 모르고, 염소도 자기 한 일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 주님이 주리시고 목마르셨으며, ‘어느 때에’ 나그네 되셨었고 벗으셨고 병드셨고 옥에 갇히셨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이 그런 형편에 계셨더라면, 만일 제쳐놓고 달려가서 내가 있는 모든 것으로 주님을 보살펴 드렸는데 말입니다. 생색내고 이름나는 일에는 제가 얼마나 열심인 줄 모르십니까? 그러나 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평소에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나누어 주며 살았습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외롭고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많았습니다.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이웃에게 베품도 관심에서 시작합니다. 특별히 전도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 영혼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전도합니다. 반면에 가까운 형제든 가족이든 그 영혼에 대하여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베품도 전도도 안 합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닙니다. 무관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며 무관심한 그런 자가 바로 염소 같다는 것입니다. 아니 영영한 지옥 불에 떨어질 염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으로 분별한 오른편의 사람들에게 하신 칭찬은 특별하십니다.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누군지 모르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네 가까이에 있는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바로 나 예수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왼편에 염소로 분별된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작은 자 나 예수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즉 소외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헐벗은 작은 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목자이십니다. 그는 지금 목자와 같이 그의 양떼를 먹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는 머지않아 야곱의 양떼와 라반의 양떼를 구별하는 것처럼(창30:35) 자신에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 사이를 분별하려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양과 염소는 이 세상에서 하루 종일 같은 목장에서 양육되지만 저녁에는 서로 다른 우리로 분리시켜 집어넣습니다. 이와 같이 나눈 다음에 목자에게 순종을 잘하는 양은 오른편에, 목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염소는 왼편에 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자는 오른편에, 가난한 자는 왼편에 둘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학식있고 고상한 사람은 오른편에, 무식하고 멸시받는 자는 왼편에 둘 것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자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오른편에, 불순종하는 자를 왼편에 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로 분별된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게 나타납니다. 34절입니다. 양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직접 받는다는 것입니다. “나아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는 복입니다.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나갈 수 없는 복입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축복하십니다. 그 나라는 ‘창세로부터’ 준비된 행복한 나라입니다. 이 행복은 성도들을 위하여 창세 때부터 계획되었으며, 영원 전부터 그 행복을 위해 예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염소들에게는 엄청 무서운 심판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 발로 가는 심판의 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또한 19절 말씀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염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도 안하고 불쌍한 작은 자 하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비된 저주는 너무 무섭습니다. 본문 41절에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물론 염소들도 임금에게 재차 물었습니다. “주가 어느 때에” “어느 때에”. ‘아니 나에게 주님이라고 말씀하셨더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얼마가 들던 돈을 들여 주님을 섬겼을 텐데요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너무너무 억울하네요. 내 이름이 드러날 찬스를 놓쳤으니’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심판은 냉정하셨습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제 마지막 심판으로 양과 염소를 분별할 예수님이 곧 재림하십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이루어질 말씀인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에서 4절 말씀이 우리 눈앞에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재림 하신다는 말씀과 2절에 “어느 누구의 말이나 편지에도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말고” 그 어떤 평화를 가장한 말이나 행동에도 쉬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이고, 3절에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이런 일이 일어나야 예수님 재림하시는데, 그것은 첫째 “배도하는 일이 있고”, 예수님의 길을 가다가 배신한다는 말씀이고, 둘째,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하나님 법을 어기는 ‘사람’ 즉 성경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야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더 자세하게 4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참으로 무섭고도 정확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과연 오늘날 이런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번에 뉴욕에 왔다간 천주교 교황입니다. 교황이외에는 이런 말씀을 이룰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성전에 앉아”(로마 베드로 성당에 앉아), “자기를 보여”(물고기 모자를 쓰고 홀 지팡이 들고), “하나님이라 하느니라”(Holy Father!). 이번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뉴욕에 와서 마지막 하고 간 말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실패했다!”(Jesus failed on the cross!) 9월 24일 맨해튼 성 패트릭 성당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간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패한 것이라면, 성경 말씀 전체는 거짓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거짓입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두는 가짜요,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됩니다(고전15:19). 이제 그보다 더한 어떤 “사람”을 기다려야 할까요? 우리는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살 때가 되었습니다. 물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어느 때나 해야 하지만 오늘날이야말로 더욱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세상이 교황에게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양과 염소는 바뀔 수가 없습니다.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입니다. 양이 염소가 될 수 없듯이 염소가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염소가 양의 우리에 있다고 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교회 건물 문턱을 오래 동안 드나든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양이 될 수 있을까요?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즉 과거의 나는 십자가에 죽고 성령과 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갈2:20).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누구를 만나도 예수님처럼 대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삽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 말씀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하셨습니다.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 행함이란 염소가 되어서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확실히 믿으면 자연히 행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양의 행동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안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처럼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요 능력이요, 그 십자가의 은혜와 감격과 감사를 체험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꼭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꼭 오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구약과 신약 성경 말씀이 모두 성취되는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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