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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보니

(창세기 33장 1-20절)

장영춘 목사 (본지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원로)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시며 전적으로 보호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 가족을 이끌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향 땅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입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4백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았다는 말은 야곱이 더 이상 형이 두려워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로 모든 것을 맡기고 이제 믿음으로 형 에서를 담대히 바라보는 표정으로 형을 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결과 얍복강 저편의 야곱의 눈이 아닌 이스라엘의 눈으로 에서를 바라보았습니다. 20년 동안 원수로 지내온 형 에서입니다. 배고파하는 형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권을 가로챘던 야곱, 그리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여 장자의 복을 받은 야곱은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발상이나 꾀를 모두 얍복 나루에서 다 씻어 떠내려 보냈습니다. 과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한 후 브니엘의 햇살을 받으며 위골된 환도 뼈로 인해 절뚝거리면서 마주오는 야곱이 에서를 바라보는 눈은 과거의 자기중심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형이라도 속여서 나만 잘되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못된 생각을 그는 얍복 나루에서 통회의 기도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새 이름인 이스라엘에 걸맞는 변화된 눈을 들어 형 에서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긴 야곱은 자기의 기도의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려고 믿음의 눈을 들어 에서를 보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이 문제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내가 드린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이처럼 자기중심의 이기심을 통회 자복하고 새로 변화된 눈을 들어 에서를 바라보자 그에게는 세 가지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1. 인간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에서가 4백인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본 야곱은 만일의 경우 에서의 공격을 받았을 때를 대비해 자식들과 아내들을 사랑하는 순서대로 배열을 하였습니다.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제일 뒤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에서에게 나아갔습니다. 전 같으면 야곱은 에서를 바라보기는커녕 눈을 돌리고 어디로든지 숨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니면 가족들 뒤에서 에서의 태도를 살피며 도망갈 기회나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형을 향하여 앞장서서 맞으러 나갔습니다. 야곱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는 멀리서 에서의 얼굴이 보일 때부터 얼굴이 땅에 닿도록 일곱 번 절을 하며 달려 나갔습니다. 일곱 번 절하는 것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자세입니다. 야곱은 진심으로 지난날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며 형과의 화해를 간구하는 마음의 소원을 몸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이때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맞으며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부둥켜안고 피차 울었습니다. 극렬한 애정의 표시입니다. 얼마나 극적인 장면입니까? 기나긴 세월동안 피붙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던 쌍둥이 형제를 본의 아니게 떨어져 있게 한 지난날의 모든 원한의 응어리가 한꺼번에 풀리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누가 에서의 복수심으로 불타는 마음을 삭혔습니까? 누가 에서의 원한에 찬 마음을 눈 녹듯이 녹여버렸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얍복나루에서 밤이 새도록 부르짖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에 은혜와 사랑의 온기를 불어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고 계시면서 원하시는 뜻대로 그 마음을 다스리시고 바꾸어 놓으시기도 하십니다. 잠언 16장 7절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미리부터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각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과의 대화에서 에서를 다섯 번이나 ‘내 주’라고 말하고 자기는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서를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에서에게 말하기를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10절)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얼굴에 나타난 따뜻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겸손한 태도로 인하여 형과 동생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었습니다. 20년 동안 격조하였던 야곱과 에서의 인간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잘 유지되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관계를 바로 정립하고 사는 자는 만사가 형통합니다.

마태복음 5장 22-24절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를 먼저 정립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형제를 보는 눈이 어떻습니까? 공부를 못했으니 가난하고 병들었으니, 못생겼으니 하며 교만한 마음으로 형제의 외모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그 영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형제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형제와 불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웃과 원수 관계로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야곱과 같이 먼저 겸손한 자세로 형제와 화목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물질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바로 하려면 물질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물질관이 바로 정립되지 못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물질 때문에 인격도, 윤리도, 가정도, 사랑도, 선도, 진리도 모두 짓밟아 버리는 추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어떤 의미에서 야곱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긴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재산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를 늘리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다 동원하여 삼촌의 재산을 자기에게 빼돌리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물질 때문에 사람들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얍복 나루에서 통회의 기도를 드린 후 브니엘을 통과하면서 야곱의 물질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형 에서와의 화친을 물질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550마리의 가축을 형을 위한 예물로 떼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한 밑천의 재산을 뚝 떼어서 형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물질보다 형과의 화목이 더 중요함을 자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정ㄹ을 보면 에서가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게 한 이들은 누구냐고 하자 야곱은 ‘이들은 나의 아들딸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주신 자식이라고 말한 것은 그 소유권자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자녀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시편 127편 3절을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므로 우리는 자녀들을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여종들과 레아와 라헬이 각각 자기의 아들들과 함께 나와서 에서에게 절하게 하였습니다. 절을 받은 에서가 “나의 만난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고 묻자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에서는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하면서 예물받기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라고 강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에서는 야곱의 강권에 못이겨 그 예물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자식뿐 아니라 자기의 소유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야곱이 물질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야곱은 나의 소유가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전에는 가지고 또 가져도 만족이 없었으나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니 가진 것으로 족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이 목자되시어 필요한 모든 것을 영육간에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땅을 내려다보며 사는 사람은 가져도 가져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물질 때문에 망하고 맙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인간관계를 깨고 있습니까? 유산을 더 차지하려고 법정 다툼을 벌이는 형제들, 거액의 보험료를 타려고 배우자를 살해하는 자들, 돈 몇 푼 때문에 이웃과 원수를 맺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물질을 우리는 내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형제간에 유산 문제로 다투는 자들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경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 12)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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