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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우리아

(사무엘하 11:14-17; 요13:1)

손영규 목사 (은혜동산교회)

인생을 살아갈 때에 불의한 자들이나 혹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죽음은 그렇다치더라도, 믿는 자, 특히 잘 믿는 자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억울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성경말씀을 살펴볼 때 정말 억울한 한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목숨을 다하여 나라와 왕께 충성을 다 받쳤건만, 믿고 의지했던 왕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고, 끝내는 자신의 목숨까지 빼앗은 천인공노할 사건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아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용사 우리아 첫째, 충성심이 강한 용사였습니다. 성경에는 그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헷사람 우리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 헷족속 출신이자, 이스라엘로 귀화한 장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의 집이 왕궁 가까이에 있은 것으로 보아 그는 매우 용맹스럽고 왕에게 큰 신임을 받는 고위급 용사였을 것입니다.(삼하 23:39) 그는 국가가 전쟁 중에 있음으로 자신 혼자 편히 집에서 쉴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명예를 위해,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죽기까지 맹렬히 싸운 투철한 군인정신을 가진 용사였습니다.

둘째, 동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에게 여러 차례 집에서 편히 쉴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왕궁의 병사들과 왕궁 문간에서 잠을 잤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투 중에 있는 군인으로서 동료들과 동고동락하기를 원했기에, 자신의 직속상관인 요압 장군과 왕의 신복들이 전선에서 야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 혼자만 호의호식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삼하11:11). 그는 진정 전우애가 강한 멋진 용사였습니다.

셋째, 신실한 신앙심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귀화한 이방인 출신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여인인, 엘리암(이름 뜻, 하나님의 백성)의 딸 밧세바(이름 뜻, 맹세의 딸)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따라서 밧세바의 가문은 신앙적으로 경건한 가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한 가문에 장가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속에 “언약궤가 군대 진영 가운데 거하고 있다”(삼하11:11)는 표현으로 보아 자신이 속한 군대가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임을 깨닫고 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비운의 우리아 첫째, 배신과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는 믿고 의지했던 다윗 왕과 상관 요압 장군에게 배신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죽어가야 했던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습니다. 둘째,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그는 생명같이 사랑하고 아꼈던 아내를 다윗 왕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녀가 솔로몬을 임신한 때에는 ‘다윗의 처’라고 기록하고 있고(삼하12:24), 그리고 솔로몬을 낳은 후로는 ‘솔로몬의 모친’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왕상1:11; 2:13).

셋째, 그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은 도리어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 왕은 그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에 즉시 간절한 회개를 함으로써 그의 죄는 씻기어졌고 그는 그 전보다 더 위대한 왕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왕 중에 최고의 왕이 되었습니다. 밧세바는 다윗 왕과 함께 간음하고서도 우리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최고의 왕인 다윗 왕의 왕비가 되었고, 또한 동서고금의 최고의 지성이요, 최고의 부를 누린 솔로몬 왕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왕상2:13).

넷째, 하나님께서 이 억울함을 알고 계셨습니다(삼하11:27/12:9-10). 성경은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삼하11:27; 12:9-10). 더욱이 “다윗은 헷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 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니라”(왕상15:5)라고 기록함에 우리아의 죽음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아에게 무슨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아에게는 그것으로 그뿐이었습니다. 그는 욥같은 갑절의 보상을 받은 것도 없이, 자식도 없이 죽고 잊혀져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의로운 하나님의 용사가 이렇게 억울하게 당해도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결국 어떻게 처리하셨을까요?

회복의 우리아 첫째, 그의 억울함은 회복되었습니다 말라기까지 구약의 모든 말씀이 끝나면서 우리아의 사건도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억울한 사정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으로 넘어옴에 갑자기 저의 눈은 빛나기 시작했고, 가슴은 퍼질 듯이 쿵쾅거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아가 비운을 당한 지 1천여 년이 지난 후에 그의 억울함이 벗겨지는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기록을 담은 마태복음 1장! 그 1절부터 읽어 나감에 6절 말씀에 와서 나의 심장은 터지는 듯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아의 이름이, 만왕의 왕이며, 만 주의 주이신,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족보 속에, 그의 이름이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유다 족속이 아니면서, 더욱이 유다 왕족이 아닌, 이방인 출신 남자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오른 사람은 오직 ‘우리야’뿐인 것입니다.

둘째, 그는 결코 아내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는 5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 다섯 여인들 모두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비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중 4명의 여인의 과정은 사람들 관점에서는 어떠하던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의로운 사람들’ 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 모두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 속에 당당하게 기록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여인, 밧세바에 대해서는 ‘밧세바’라는 그녀의 본명이나, ‘다윗의 아내’나, ‘솔로몬의 모친’으로 기록되어 나타나지 않고, 오직 ‘우리야의 아내’로 기록되어 나타나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관점은 어떠했던지 이스라엘 왕들의 실록에는 ‘다윗 왕의 아내’, ‘솔로몬 왕의 모친’ 또는 ‘밧세바’라고 기록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녀는 여전히 ‘우리야의 아내’였던 것입니다. 심판주 하나님께서 판결을 내리심에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인 것입니다. 우리아는 결코 그의 아내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은혜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엡2:19). 하나님께서는 1천년의 세월을 기다리시며, 가장 복된 시기에, 가장 복된 모습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 속에 가장 명예롭게 그의 이름을 남기게 하셨습니다. 다윗 왕에 의해 배신당하고 죽임 당했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완전히 회복되고 부활되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완전히 회복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상처받은 모든 이들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심이 그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산소망인 것입니다. 결론 및 적용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미움과 절망과 사랑 사이에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처음과 끝 사이에서의 삶은 죄악 되고 왜곡 되어진 세상입니다. 신자들에게도 그 중간에서의 삶은 여전히 배신과 실망과 실패와 사고와 질병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진정 ‘믿음의 사람’은 그 삶의 중간에서 갖가지 궂은일과,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과, 모욕적인 악을 겪으면서도, 이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꼴사나운 ‘중간’이 사실은 눈부신 시작’과 ‘영광스런 끝’과 통하는 길임을 언제나 포기하지 않고 믿고 나가는 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때때로 배신을 당하고, 사랑하는 것을 잃게 되고, 심지어 우리의 생명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우리는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결코 한 사람도 외면하거나, 방관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책임지십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용사 여러분! 힘을 냅시다. 용기를 가집시다. 주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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