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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삶

(마태복음 18:21-35 )

이 성 모 목사 (의정부 은평교회)

성경적인 용서의 개념은 빚을 탕감하여 주는 것인데(27절), 탕감한다는 말은 ‘포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인격적인 공격과 악한 말들과 불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성도들은 자신이 당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성도로서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과 같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금(金) 3천 달란트를 준비했고(대상29:3-4),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바친 금액이 120달란트였고(왕상10:10), 앗수르 왕이 히스기야에게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요구했던(왕하18:4), 사례들로 미루어볼 때 일만 달란트는 일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따라서 이는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로서 결국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우리 자신이요. 우리의 죄는 우리의 자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는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여야 하겠습니다.

2. 남을 용서하는 삶이 은혜를 갚는 삶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 어떤 방법으로도 갚을 수 없는 중한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라고 증거한 것처럼, 우리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죄라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는데, 주께서 은혜로 이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셨습니다. 본문에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는 자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수 없습니다(25절).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주인에게 자비를 구하는 길 밖에 아무것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27절).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의 빚을 그의 크신 긍휼과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나자 갚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그 동관이 나중에 갚겠다고 했지만 그 종은 그를 가두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의 금액입니다. 그런데 이 돈을 받기 위해 그는 지금 동관에게 난폭하게 굴며, 협박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은 탕감해 준 것을 취소하고 그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용서 받고도 다른 사람의 조그만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 값을 도로 받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자이거나 체험했다 할지라도 망각한 자일 것입니다. 결국 무자비한 종이 주인으로부터 엄한 중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우리 죄를 용서하심 같이, 그렇게 단번에 용서하고... 그리고 잊어버릴 때 평생에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용서하기를 힘쓰는 자는 주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하느니라’(마5:44, 46).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는데 힘을 쓰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요8:11).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에게 용서를 베풀어 낙원의 축복을 허락하셨고(눅23:43), 주님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눅23:34).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 말씀은 490번만 용서하고 491번째는 복수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무한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제안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통용된 용서의 한계를 뛰어 넘는 파격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용서의 한계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렸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어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9). 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여기서 ‘이처럼’이란 말은 “단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그 대가로 영생을 선물하실 만큼 엄청난”이란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까지 기꺼이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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