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성 박사 (생리학, 창조과학선교회)
“예수 믿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철이 없었던 8살 때부터 수십 년 간 들어왔지만 도대체 무엇을 믿으란 말인지, 오랫동안 의문을 품어 왔었다. 믿는다는 말도 어렵지만 무슨 내용을 믿어야 하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짧은 전도지도 있고 한 권의 책도 있는데 ‘왜 내가 복음이 필요한 존재인지’ 근본적인 필요성에 공감하기 어려웠고 복음에 대한 설명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보험 들고 맘 놓고 사세요!”란 말이 비슷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천국 보험과 의료보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지금도 예수 믿는 것을 보험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믿는 것은 보험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복음이란 그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자주 듣는 말처럼, 만약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고 그래서 예수 믿으면 살기 좋은 천국 가서 영원히 살고 예수 안 믿으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밑져야 본전인 셈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불구덩이에 집어넣는다는 것도 믿기 어렵고 어차피 죽음을 전제하고 태어난 존재인데 계속 죽는 것이 무엇이 문제랴? 보험에 안 들고 보험금 안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있다. 도박 중독에 걸린 사람은 본전 생각 때문에 그 버릇을 끊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은 바로 이 잃어버린 본전(처음 상태)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이것을 회복할 방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과거 조상이 부자였지만 가난하게 된 어떤 사람이 큰 재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경우가 있다. 본인은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큰 재산이 있을 것으로 기대도 않고 그래서 당연히 찾아 볼 마음도 없이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횡재를 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횡재가 아니라 당연히 그 사람이 가져야 할 재산인데 사실상 잃어버렸을 뿐인 것이다.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우리 인류도 원래부터 이렇게 죽음을 못 면할 존재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완전한 지구를 다스리며 살 존재였다. 이 완벽한 지구를 다스릴 수 있는 역량과 권리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였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자녀란 말이다(눅3:38). 우리 인류는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알지 못한다면 복음은 참 복음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좋았던 처음에 대해 들어볼 기회는 자주 있는 것 같지 않다. 들려오는 거의 모든 복음은 죄로 죽었던 상태에서부터 시작된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온전한 복음의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의 절반일 뿐이다. 반쪽복음인 것이다. 물론 이 반쪽만 잘 전해도 훌륭한 말씀이 된다. 하지만 그 말씀이 좋으면 좋을수록 다른 반쪽 때문에 더욱 마음이 졸여지고 아쉬워하게 된다. 또 다른 반쪽이 전해졌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또 다른 반쪽은 복음이 아니라 저주의 소식이다. 무지하게 좋았던 처음 상태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류가 죄에 죄를 더하는 역사를 통해 죽음과 파괴와 절망에 이르렀다는 나쁜 소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환경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며, 형제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여야 할 사람들 간에 관계도 갈라지고 찢어져 원수가 되어 이 땅에는 경쟁과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이 암흑의 역사 한 가운데 태어나는 각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죽은 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살 수 없는 아니 살아서는 안 될 이 저주 받고 심판 받은 지구에 태어나서 여기서 죽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소식 때문에 복음이 참 복음이 되는 것이다. 이 절망적인 소식이 곁들여지지 않은 복음은 자칫하면 보험이나 복권을 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보다 조금 낮은 영광스러운 존재였으며, 하나님께서 영화와 존귀의 왕관을 씌워 주셨고,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들 곧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다고 다윗은 노래하였다(시8편).
바벨탑 사건 후에 중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조상 조(祖=示+且)와 영화 영(榮)자에 담았다. 그들은 우리들의 조상을 사람의 마음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보시(示)는 창조주 하나님과 버금가는(且) 영광스러운(榮)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상태는 빛나는 두 사람(火+火)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木)에 접근하지 않고 울타리 밖에 있을 때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류는 이 영광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로 그 영광스러운 자리로 회복된다는 소식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그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살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 지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사45:18). 이 지구를 위해 하나님은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을 창조하셨으므로(창1:17) 우주는 하나님의 형상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가 광대하면 광대할수록 사람은 그보다 더욱 더 존귀한 존재가 된다. 종류대로 창조된 채소와 과일도 사람을 위한 것이며, 종류대로 창조 된 물고기들과 공중의 새들도 우리를 위한 것들이었으며, 집채 만한 공룡과 깡총깡총 튀는 귀여운 토끼들도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다.
사람들의 죄로 저주 받고 심판 받아 철저하게 망가진 이 지구와 우주이지만 아직도 너무나도 좋은 것들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세상은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고린도전서 2장 9절이 좋은 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음 칼럼들을 통해 복음의 기초인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을 통해 더듬어 발견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