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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합시다

강준수 목사 (라스베가스 안디옥교회)

부인이 수첩에 항상 남편의 사진을 넣고 다녔다.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묻자 “골치 아픈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 사진만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했다. 당신은 어쩌면 그토록 남편을 사랑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대답을 한다. “그런게 아니라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어 금방 해결된다”고 했다. 한 집에서 한 솥밥 먹고 살면서도 원수처럼, 남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개그 프로그램 가운데 “불편한 진실”이란 코너가 있다. 겉으로는 친한 척 대화를 하지만 속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는 가식적 대화와 관계를 말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미워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있는 대상들은 다 우리의 가족이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서로 싸우고 죽이는 관계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원수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바로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가 한없이 사랑했던 사람들이며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성경에 보면 라반이 말한다.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라반은 화해의 몸짓을 하며 서로 언약을 세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한다. 야곱도 이 시점에서는 갈등을 멈추고 싶었는데 마침 라반이 그런 제안을 하게 된다.

사람들 가운데는 화해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먼저 말하지 못해서 화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용덕 씨의 “내가 먼저”라는 찬송이 있다. 가족처럼 지내던 친구와 사소한 의견차이로 서로 상처를 주고 그만 관계가 멀어졌다. 어느 날 밤 성령님이 이 사실을 괴로워하고 아프게 하셨다. 그날 밤 친구를 찾아가 화해하고 친구와 함께 만든 노래라고 한다.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고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친구나 동료, 가족과 다투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 용서를 하면 마음에 평강과 안정을 되찾게 되지만, 용서하지 못하면 분노로 괴로워하거나, 복수를 위해 고민하기도 하고, 한 평생 원수처럼 지내기도 한다. 상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아파하고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쥐약은 자기가 먹고 상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용서프로젝트’의 설립자이자, ‘용서학’ 교수인 프레드러스킨(Pred Ruskin) 박사는 심리학과 의학을 접목시킨 과학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용서“라는 책을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용서할 때 스트레스와 분노가 감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여 건강하고 행복하게 된다”고 밝혔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당신이 남에게 복수하면 그 기쁨은 잠깐이지만 당신이 남을 용서하면 그 기쁨은 영원하다”라고 했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용서로 치유 받는 최초의 그리고 많은 경우,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이다... 진실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준다. 그러고 나면 자기가 풀어 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 살다보면 독한 화살에 맞을 때가 있다. 친구에게 남편을 빼앗긴 사람이 있고 친구에게 돈을 사기 당한 사람도 있다. 심한 모욕을 당한 사람이 있고 집단 따돌림을 받은 사람이 있다. 모두 화살 맞은 사람이다. 이때 화살을 빼고 상처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떤 놈이 화살을 쏘았어. 저 놈이 내게 활을 쏘아!” 그리고는 원수를 찾아다닌다. 원수를 독과 함께 품고 산다. 결국 자기가 죽는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용서는 위대한 힘이 있다. 병든 몸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고 흐트러졌던 인격을 가다듬어 주는 위대한 힘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영혼을 풍성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영국에 유명한 웰링턴제독이 있었다. 이 제독이 한번은 상습적인 탈영병 부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 직전에 말하기를 “나는 너를 교육도 시켜보았다. 채찍을 들어 너를 때려도 보았고 노동도 시켜보았다. 굉장히 심각한 벌도 주었다. 그러나 너는 돌이키지 않았고, 새로워지지도 않았다. 별 수 없이 너는 죽어야 한다.” 이 때 지혜로운 웰링턴제독 부하 한 사람이 제독에게 나와서 “각하! 각하께서는 아직 이 사람에게 한 가지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각하는 이 사람을 용서해보신 적이 없습니다”고 했다. 제독은 이 지혜로운 부하의 충고대로 무조건 용서를 해주었는데 그 후 이 사람은 변했고 다시는 탈영도 하지 않았으며 웰링턴의 충성스런 부하가 되었다. 용서가 가져온 삶의 변화이었다.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용서”이다. 기독교의 진리가 용서요 복음의 내용이 용서이다. 십자가의 의미가 용서요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을 표현해 본다면 용서이다.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 십자가로부터 용서를 제하고 나면 나무토막만 남을 것이다. 기독교는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마쳐지는 종교이다. 누구나 교회 처음 나오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 땅에 생이 마감되고 천국 입구에 들어설 때 용서의 문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용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천국 문 앞에서 주님이 물으실 것이다. “너는 용서받았느냐? 그리고 모두를 용서하고 여기 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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