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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Don’t Worry)

차용호 목사

(센터빌한인장로교회)

우리 가운데 날마다 염려를 하지 않는 분은 한분도 없을 것입니다. 열이면 열 다 염려를 하면서 한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우리에게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다른 말로 말하면 생명의 안전과 건강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염려의 뿌리요,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목숨과 몸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이 염려가 점령군이나 폭군처럼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과 건강을 위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상치 못했던 사건, 사고, 교통사고 자연이 오염되어 버린 지구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매일 살고 있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우리의 목숨이나 몸이 얼마나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까? 나 하나만 아니라, 우리의 가족들이 어려운 상황에 노출되어서 매일매일 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런 형편에서 염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태평성대를 누린 솔로몬이 인생을 "수고와 슬픔뿐"(시 90:10)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염려는 인간됨의 실존이요,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가운데 하나가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염려는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근심을 하고 염려를 하면 뼈가 썩어 들어가고 말라가는 치명적인 병이 들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세 가지 악이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술에 취하고 알코올에 중독되어 방탕한 사람은 벌써 인간다움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염려가 방탕과 술 취함과 맞먹는 악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돈에 마음이 빼앗기면 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의 영과 육을 병들게 만들어 망칩니다. 염려는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안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염려는 무익하기 때문에 안 할수록 좋습니다. 염려는 해봐야 소용이 없고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 염려는 마치 자동차에 앉아서 기어를 중립에 놓고 시동을 건 다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기어를 중립에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보십시오. 웽! 웽! 소리는 요란합니다. 엔진은 나 죽는다고 돌아갑니다. 기름은 펑펑 들어갑니다. 그러나 차는 한 치도 안 움직입니다. 에너지만 소비합니다. 소음만 요란합니다. 염려가 꼭 기어를 중립에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염려는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에너지만 소모돼 버립니다. 그러니 염려는 무익하고 쓸모없는 겁니다. 

세 번째로 염려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안 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아직 이르지도 않았고 내 것도 아닌 시간과 날을 놓고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염려는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혹시라는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오지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혹시로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혹시가 내 마음에 염려로 자꾸 차 오르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탐욕이 생기고 조급해지고 나중에는 우울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이와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 가운데 "오늘을 내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만이 행복하리라." 염려는 오늘부터 나의 행복을 앗아가는 강도입니다. 주어진 오늘도 제대로 살 줄 모르면서 내일을 끌어안고 씨름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잘 돌아 보십시오. 이처럼 염려라는 것은 해로운 것이요, 쓸데없는 것이요, 무익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문헌을 보면 초대교회 별명처럼 자기 이름 앞에 붙이고 다니는 말이 "티테디오스"라는 말입니다. "티테디오스"는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초대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했습니다. 그들의 삶에 인간적인 기쁨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그들이 보고 나서부터는 그들의 가슴이 얼마나 은혜로 충만했는지 모릅니다. 한 생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종사하는 모든 생업을 통해서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가정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로마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 세계에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헌신된 삶을 살자 염려가 다 날라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염려에서 해방되니 이것을 좀 자랑하고 싶어서 "티테디오스 베드로, "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도마"하고 이름을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죠지 뮬러는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다. 그러므로 염려하느냐, 믿음이 죽는다. 믿음을 가지느냐, 염려가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믿음의 세계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런 담대한 믿음 주셔서 염려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염려 없이는 도무지 하루를 살 수 없는 불안한 세상에 살지만은 "티테디오스 그리스도인"이라고 외치며 "염려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 모두 기도하여 염려에서 자유 함을 받은 기쁨으로 찬송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chayongho@hotmail.com

10.2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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