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수 목사 (라스베가스 안디옥교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지구의 계절이 변화하는 중요한 원인은 지구가 자전축이 기울어진 채로 공전을 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축은 지구의 북극과 남극을 연결한 축으로 23.5도 기울어져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는 이 삐딱한 경사각으로 인해서 지구가 태양과 이루는 각도가 달라져서 지구에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생기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설명은 지구의 기울기가 23.5도보다 조금이라도 더 크거나 작다면 지구의 계절은 사람이 살수 없는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정확하게 계산된 23.5도 기울진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계산된 것인가를 깨닫고 놀란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배우는 지구본도 보면 둥그런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삐딱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교육감이 어느 학교를 방문했는데 마침 이 지구본을 놓고 과학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이 눈에 띄었다. 교실을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기 반장! 여기 이 지구본이 왜 이렇게 삐딱하게 기울어져있지?” 반장이 깜작 놀라서 손을 저으면서 대답했다. “그거 저희가 안 그랬어요.” 자기 잘못 아니라고 책임만 회피하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교육감이 이번에는 그 선생에게 물었다. “김 선생, 이게 왜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지 직접 대답해보겠어요?” 하고 물었더니 선생님 대답하는 말이 “아! 그거 처음에 사올 때부터 그랬어요.” 그러더란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기만 한 아주 타성적이고 무책임한 대답을 하는 것이다. 너무 기가 막혀서 화가 난 교육감이 그 지구본을 들고 교장선생님실로 갔다. “교장 선생님, 이 지구본이 왜 이렇게 삐딱하죠?” 하고 물었더니 교장선생님 말씀이 “그거 모르십니까? 요즈음 중국산 다 그렇죠.” 그러더란다. 이건 참 기가 막힌 얘기이다. 학생이나 선생이나 교장이나 이렇게 타성에 젖었는데 이래 가지고 교육이 되겠는가? 이렇게 멍청하고서야 무슨 일이 되겠는가? 생각해보면 우리 사는 세상에 사건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건에 대한 자세, 그 마음가짐이다. 어떤 일을 당했느냐고 묻지 마라.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지능이다, 지식이다, 기술이다, 실력이다 무슨 얘기를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관심과 구체화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보시라! 실수와 실패는 같은 것이 아니다. 실수란 하나의 과정이요, 실패는 바로 결과이기 때문이다. 실패라는 것은 끝났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실수란 수없이 반복되면서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정으로써의 실패는 있지만 결론적인 실패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실패가 되느냐 실수가 되느냐 하는 것은 그 문제, 사건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에 달린 것이다. 자연히, 또는 자동적으로, 우연히 그렇게 되는 일은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이다. 실패했다고 곧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패는 사건이요. 실패자라는 것은 인성자체의 문제이다. 실패라고 하는 사건은 있으나 실패자는 될 수 없다. 실패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걸 알아야 한다. 실패하는 인격이 되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실패라고 하는 사건들을 통하여 더 건전하고 더 건강하고 더 바르게 더 생동력 넘치는 그런 인격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건과 생명이 지닌 역설적 관계이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이다. 저들이 각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보라! 이제 가인이 여기서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어떤 태도로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좌우된다. 이 순간 그가 무엇을 생각했느냐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그의 운명은 결정되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라고 말한다. 이 논리에 의하면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믿음 없이 드렸다고 하는 얘기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가인 콤플렉스가 나온다.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심히 분해했다. 이 사건 앞에서 이 분노가 잘못된 생각이다. 그래서 안색이 변했다. 얼굴색이 달라졌다. 그 마음에 갈등, 고민을 말하는 것이다. Complications 그 갈등을 여기서 말해주는 것이다. 몹시 괴로워 한 것이다. 그래서 가인은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그 가인의 얼굴을 생각해보라. 이게 지금 괴로워 할 일인가?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인데 내 속마음 내 진실을 아시는 분인데 그분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지, 왜 안색이 변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판단에 대하여 공손하게 수락하지 못한 것이다. 겸손하지 못했고 진실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가 고민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제물을 다 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사람이 안색은 안 변했을 것 같다. 그런데 한 사람 것은 받고 자기는 받지 않으시니까 고민한 것이다. 이건 질투이다.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은 원죄, 그 원죄 중에 가장 뿌리 깊은 죄가 시기 질투이다. 그것은 아주 무서운 것이다. 가만히 보라. 전부가 이 시기 질투 때문에 잘못되는 것이다. 내가 못 살아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 잘 사는 게 배가 아파서 그렇다. 그런데 시기 질투 때문에 마지막에 신앙까지 잊어버린다. 이성도 병들어 버리고 그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시기와 질투란 그 인성을 사람의 마음을 아주 썩게 만든다. 결국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때 잘못된 것을 사람에게서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책임전가를 한다. 그 책임적의 대상 아벨을 생각한 것이다. 이런 가인의 얼굴은 이웃 지향적, 타인 지향적 속성이 묻어있다. 내 문제는 내 문제이다.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다. 그 누구 때문도 아니다. 결국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지 그 누구와의 관계도 아니다. 이것이 성경이요. 이것이 신앙이다. 가인은 하나님이 안 받으셨으면 다시 하나님께 바로 나와야지. 왜? 아벨을 생각하는 것인가?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았던, 안 받았던 왜 내 기분이 나빠지는가?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뭔가? 그 50년 혹은 70년 동안에 많은 혁명을 일으켰다. 그 혁명의 기본철학이 뭐냐 하면 내가 못사는 이유가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난한 것이 저 부자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가인의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당한 이 어려움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남의 얘기 할 게 아니다. 내가 어려워진 이유가 누구 때문이라고 쉽게 말한다. 무슨 사건이 하나 터졌을 때 총체적 위기라느니 사회적인 문제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 말하는 동안에 그 뒤에 있는 비밀한 말 한마디가 있다. 너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고, 내 책임은 아니라는 말로 들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해결이 없다. 모든 책임은 내 자신에게 있다. 그걸 알아야 한다. revpetergang@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