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수 목사 (라스베가스 안디옥교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성령에 이끌려 산다. 주님이 주신 말씀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이끌려 사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깨닫고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줄로 생각을 하지만 믿음이 자라 후에 돌아보면 그게 아니다. 내가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인도하여 나를 믿게 한 것이고, 그가 나를 붙들어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에 감격하면서 좀 더 나아가 그 크신 경륜 속에 내가 쓰임받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람은 주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는 정체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아의식이다.
William James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자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자아는 물질적 자아, material self 라고 말한다. 신체와 물질적 소유에 의해서 자기를 평가하면서 사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골동품 수집가를 보자. 골동품 수집가의 자존감은 얼마나 귀한 골동품을 많이 소장했느냐에 있다. 이 수집가들끼리 모여서 토론할 때 보면. 누가 제일 잘났는가? 인물이든 학벌이든 과거든 현재든 그런 것 묻지 않는다. 누가 더 소중한 골동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 그 마음, 그 긍지로 살아가고, 오늘도 내일도 어디 더 좋은 골동품이 없나 찾아 헤맨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 존재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자아는 사회적 자아다. Social self. 이건 누구의 친구냐, 누구의 자녀냐, 어느 회사사장이냐 또는 어디 출신이냐, 박사학위를 가졌느냐, 그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역할에 따라서 평가를 한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자아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중년이 지나면 거의 다 '빈 둥지 증후군'에 빠지고 만다. 그 소유가 없어질 때, 내 사회적 지위가 무너질 때 마치 그 둥지에 알을 낳아 기른 새끼들이 다 커서 훌훌 날아가 버리면 텅 빈 둥지만 남는다. ‘빈둥지증후군’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는데 결국 허망하고 허무해서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절망하는 것이다. 비참한 것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더 비참한 것은 자기를 도적맞는 것이고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자기 자신을 빼앗기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비참한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 자아의 종말이다. 세 번째 자아는 영적 자아이다. Spiritual self.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그 소유의 양으로 사람을 보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내면세계에 의해서 평가되는 자아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생각하는 것이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살아 있느냐 또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이 깨끗하게 보존되었느냐 그것이 사람의 평가기준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이보다 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를 세웠던 바울이 그 옛날 일을 회고하면서 고백하는 내용이 고전 2장에 나온다. "내가 너희 가운데에 거할 때 약하여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솔직한 고백이다. ‘약하여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바울도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하고 그 은혜로 다시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면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식이나 능력도 아니고 그의 의지도 아니고 바뀐 환경도 아니다. 오직 하나, 다시 발견한 십자가의 복음 때문이었다. 또한 '말씀에 붙잡혔다'라고 말한다. 붙잡혔다 '쑤네케토' 이 말은 영어로 Occupied, 점령되었다는 말이다. 완전히 포로되었다. 점령되어서 완전히 붙잡힌, 그런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될 때에 그 생각도 그 의지도 그의 운명도 이제는 다 그를 붙잡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내게는 자유가 없다고.... 오직 강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내적으로 끓어오르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저항할 수 없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I have no choice,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이 길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 상태로 사는 것이 바울의 모습이다.
한번은 “북한이 어려운데 어떻게 그런 체제로 오래 가는지 참 궁금하다”는 질문을 하니까 어느 목사님이 본인이 직접 북한에서 보고 듣고 확증한 것이라며 설명한다. 그 목사님이 그 김일성 수령과 그 부자를 위해서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물었단다. "당신들은 어떻게 해서 수령님께 그렇게 충성을 다하고 있느냐"? 그러니까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더란다. "우리는 다 같이 전쟁고아였어요. 6·25전쟁 때 미제놈들이 융단폭격을 해서 다 망하고 다 죽어버렸습니다. 고아들, 어린아이들만 남았는데 이 우는 아이들을 우리 수령님이 탁아소를 세우고 데려다가 잘 키워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커서 이렇게 김일성대학까지 나오게 했어요.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또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얼굴도 모릅니다. 오로지 수령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큰 은혜에 감사해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죽으라면 죽습니다." 그러더란다. 하도 기가 막혀서 또 물었단다. "당신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요?" 그랬더니 "20만 명입니다." 그러더란다. 그 어버이 수령이라는 말이 절대로 과장된 말이 아니다. 진짜로 어버이 수령밖에 모른다. 그 20만 명이 있으므로 저 북한이 서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헌신하는 그들에게는 다른 자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 선택권도 없다. 오로지 그 수령에 감사하고만 있을 뿐이다.
보라, 참으로 믿음의 사람은 선택권이 없다. 특별히 결과에 대해서 아무 두려움도 없다. 그분이 ‘가라’하시니 그 결과도 '가라' 하신 분이 책임질 것이다. ‘가라’하는 말씀에, 나는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 때 아무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그에게는 아무 두려움이 없다. 잘될까 못될까 걱정 안 한다.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기쁨으로 순종할 뿐이다. 그리고 나를 불러 가라하신 그 은혜가 감사할 뿐이다. 여기에 진정한 용기와 자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는가? 물질에 붙잡혀 세상을 살아가는가? 세상 사람의 시선과 명예인가? 세상 향락인가? 무엇이 자유롭지 못하도록 여러분을 붙잡고 끌어가고 있는가?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길은 도리어 말씀에 붙잡혀 사는 길 외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얼마나 성경말씀을 사랑했는가? 얼마나 성경말씀대로 살았는가? 말씀에 붙잡혀 사는 바로 그 사람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revpetergang@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