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수 목사 (라스베가스 안디옥교회)
소설이나 연극, 영화 같은 작품은 그 성격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하나는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희극이다. 착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으면 비극이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어도 마지막에 가서 해피하게 끝나면 희극이 된다. 성경에도 보면 모세는 궁중에서 화려하게 시작하지만 마지막 가나안을 바라보면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음으로 해피하지 않게 끝난다. 솔로몬은 21세에 왕이 되어 지혜의 왕으로 40년 태평성쇠를 누리지만 마지막은 섭섭하기 그지없게 세상을 떠난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도 한국최초 여성대통령에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이 되는 영광을 누리지만 지금은 탄핵을 받는 서글픈 인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다.
문제는 마지막이다. 중요한 것은 자난 날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 의해서 그 생애가 평가된다는 사실이다. 여러분의 인생도 지난날보다 이제 마지막이 될 오늘과 내일에 의해서 결론이 내려질 것이다. 요셉은 대단히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 마지막이 너무 아름답게 펼쳐진다.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담뿍 받다가 형들의 시기를 받아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노예로 팔려간다. 이런 어처구이 없는 억울함을 당하는 요셉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뻔 했다가 노예로 팔려 가는가 하면 노예로 팔려가서도 진실 성실하게 산 것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고 13년 동안이나 죽을 고생했으니 말이 될 일인가?
그러나 그 후에 요셉은 그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분명한 것은 이런 영광의 날을 맞이하기까지 요셉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고 억울한 일을 겪어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어떤 고난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지 그는 하나님만 믿고 신실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총리가 된 다음 형들이 가뭄을 만나 양식을 구하려 애급에 와서 국무총리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한다. 모두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데 그 때 요셉이 용서를 한다. 그러나 형들은 그 용서가 일시적인 용서로 생각해서 계속 불안해하고 있으면서 요셉은 효자이니까 아버지가 살아생전에는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복수를 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마친 뒤 그 장면을 보여준다. 형들이 돌아와서 동생 요셉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이 형들을 용서해주라고 유언하셨으니 그 아버지를 생각해서 형들을 용서하라고 하면서 우리는 이제 당신의 종이라며 무릎을 꿇을 때 요셉은 눈물을 흘리면서 형들을 용서해준다,
난폭한 장난끼를 가진 청소년아들이 하루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날이 없이 지낸다. 아버지는 사정을 했다. 일주일만 사고를 저지르지 않고 지내면 아빠가 큰 상을 줄게 제발 한 주간만이라도 조용히 집에서 지내라, 그러자 아들이 용하게도 무사고 한 주일을 지냈다. 아버지는 참 착하다 칭찬을 하면서 약속한 상을 주었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한 마디 하기를 그렇게 착한 아이가 그동안은 왜 그 모양이었느냐, 그러자 아들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하나님과 닮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도 않으신다고 했지 않아요?“ 하면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버리더란다. 우리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지난 얘기 또 하고 또 한다. 돌아가 원점에서 다시 싸우고 불화로 이어지게 된다. 용서하겠으면 지난날을 깨끗이 백지로 돌리고 깔끔하게 용서해주어야 한다. 성경은 과거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친다. 2016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해 넘어가기 전에 깔끔하게 용서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동안 마음에 쌓였던 앙금과 주고받은 상처 그 아픔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다.
요셉처럼 형들의 진심을 믿고 나는 다만 용서할 권한만 있지 복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주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그 베드로에게 찾아가신 예수님을 보라!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의 확인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냥 깔끔하게 용서해주신 것이다. 요셉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아니 하나님의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하는 믿음으로 그 아픈 사건을 당당하게 강함의 사람답게 용서하신 것이다.
‘평화’의 반대는 ‘불화’이다. 인간관계 속에 평화도 불화도 있기 마련이고 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과계가 평화에서 불화로 변해가는 과정에 그 시작에 용서가 있었다면 아니 깔끔한 용서가 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행복이 깃드는 관계 곧 화평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성탄절이 되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축하하며 노래한다. ‘평화의 왕’ 무슨 말인가? 불화한 관계 즉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불화이었고 사람과 사람사이가 불화이었지만 이 불화를 평화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 이란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불화의 원인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고 그래서 ‘다 이루었다’ 천명하신 것이다. 바로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오셨고 그 평화의 시작인 용서를 이루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이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서 우리도 요셉과 같이 깔끔하게 용서하고 주님을 맞이하며 또 새해를 그렇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revpetergang@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