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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와의 관계

강준수 목사 (라스베가스 안디옥교회)

인생에 있어서 이 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면 우리는 누구나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자라고해서 신자들만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사는 한 어쩔 수 없이 불신자들과도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세상의 불신자들과의 관계도 잘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불신자들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하나 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면 불신자들과 분리해서 살아야 한다. 아예, 안 만나고 사는 사람이 예수 잘 믿는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불신자와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거룩한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불신자들을 사탄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고대 유대인들도 불신자들 이방인들을 지옥의 불소시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울 만치 불신자들을 가까이 하셨고 또 찾아가라고도 하셨다.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무슨 말씀인가? 땅 끝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가서 그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네가 알고 있는 신앙의 비밀을 말해주라는 것이다. 너희 믿는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 아닌가?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만 소금이니 빛이니 하지 말고 불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들이 인정해 줄 만큼 불신자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70명의 지지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어디로 보내셨는지 아는가? 바로 안 믿는 자들, 불신자들의 집으로 보내셨다. 그만큼 우리 주님은 불신자들과의 관계를 깊이 인식하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우리같이 좀 오래 믿은 교인들을 보면 신자들끼리는 친숙해져 있다. 어느 모임에서도‘오늘 은혜 받았어!’그러면 ‘아멘”하고 신앙적인 용어도 착착 잘도 주고받는다. 그러나 불신자들과 만나면 왠지 어색하고 몸이 꼬이고 심지어 거부감까지 느끼게 된다. 몇 년 전에 한국에 나갔다가 50년 전에 헤어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는데 친구들이 저를 알아보고는 제 이름을 불러가며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반갑게 인사는 받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웬 일인지 친구들인데도 어색함을 느꼈다. 그런데 교인들과 항상 정중하게 존댓말만 하다가 갑자기 반말하는 것이 어색해서인 것만은 아니었다. 돌아오면서 어색한 이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해보았는데 믿는 사람이 불신자들을 만날 때 그 가운데 들어가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분명히 제게 있어서 친구들인데도 그렇게 어색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데 분명히 그들이 불신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교인은 교인끼리의 관계에서도 성공해야 하고 내 주위의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성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신 결과이고 따라서 신자가 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이고 섭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홀로 우리 각자를 믿게 하셨다 할지라도 우리 교인들이 불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성경은 우리 교인들이 불신자와의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또 그 관계에서 무엇인지 중요한지를 설명해준다,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움을 두려워 말며’ 했다. 믿는 사람이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먼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났다고 그랬다. 믿는 사람이라도 선을 행하다가 고생할 수도 있겠지만 악한 일을 하다가 고생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어느 집사님 가게를 예고 없이 심방을 갔다. 그런데 Wrong time Wrong place였다. 막 얼굴이 마주쳤는데 그때 막 담배를 입에 물고 빨아드릴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담임목사님이 나타나니까 엉겁결에 그걸 그냥 입에 집어넣었다. 당연히 입안을 데웠다. 그 순간 얼굴이 노래지고 야단이었다, 심방을 끝내고 돌아오는 차속에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왜 목사 앞에서만 잘 보이려고 그럴까? 자기가 교인인 것을 다 알고 있는 주변의 불신자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듯 제멋대로 행하면서 왜 목사 앞에서는 그럴까? 불신자에게 잘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데 말이다. 불신자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나 때문에 영원히 실족하게 돼서는 안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를 보고서 예수 믿어 봐도 별수 없더라 하면서 불신자가 실족하게 되는 일이 없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사실 대단히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만일 내가 먹는 음식으로 인해서 형제가 실족하게 된다면 실족하지 않게 하기위해서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만큼 ‘나와 불신자와의 관계’불신자가 하나님께 나오는 통로를 가로막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교인인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교인인 나를 통해서 천국과 주님을 보고 교인인 나를 통해서 은혜의 기쁨을 맛보게 되어있는 그 불신자를 의식하면서 그 눈앞에서 선하게 사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란다. revpeterg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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