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진 목사 (샌디에고 반석장로교회)
최근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자처한 무장괴한들이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 사무실에 침입해 편집국장을 포함하여 최소 12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2006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도 창간된 사회주의적 좌파성향의 주간지 샤를리 엡도는 항상 ‘평등한 기회’를 옹호하는 정치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 종교라는 성역을 넘어서 자유자재로 풍자만평을 그려왔는데, 이러한 풍자정신이 이슬람교의 창시자이며 최고의 선지자로 불리는 무함마드까지 확대되면서 이슬람문화권과 충돌하게 된다. 2006년 샤를리 엡도는 원래 덴마크 일간지 질란드-포스텐이 게재했던 무함마드 풍자만평을 옮겨 실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파리의 이슬람사원을 비롯한 프랑스 이슬람단체들은 샤를리 엡도를 상대로 ‘인종차별’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하게 된다. 그 후 2011년 샤를리 엡도는 아랍의 봄 기념 특별호 표지에 무함마드의 모습과 함께 ‘웃다가 죽지 않으면 태형 100대에 처한다’는 내용의 말 풍선으로 구성된 만평으로 또 테러와 방화를 당한다. 이에 질세라 샤를리 엡도는 ‘사랑은 증오보다 강하다’라는 제목 하에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수염을 기른 이슬람 남성과 샤를리 엡도의 만평작가가 키스하는 그림을 표지에 실었다. 이에 전 이슬람 문화권은 다시 공분하게 되면서 보다 구체적인 테러를 준비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이번 사태를 낳은 것이다. 이러한 여파는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132명의 어린이들에게 총구를 겨냥해 비참하게 처형하는 사태로 번지고 있다.
이후로 전 세계는 언론의 자유와 신성한 종교의 권위가 계속적으로 대립하며 충돌하고 있다. 이슬람권 국가들은 서구권이 언론의 자유를 빙자하여 신성한 종교의 권위를 조롱하며 무너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권은 언론, 출판, 자유, 인권의 영역에는 종교도 예외 없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극단적 대립과 충돌의 상황에서 지난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슬람 문화권의 무력을 통한 테러현상은 빈곤에서 온 것이나, 서방의 대 중동정책에서 온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와 종교 다원주의를 포함한 서방문명과 신조에 대한 이념적 도전의 행위로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서방세계가 이슬람 테러를 두려워하여 ‘자유’라는 절대적인 핵심가치를 포기해서는 안되며, ‘이슬람포비아’(혐오증)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척결할 ‘종교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분노하는 서방세계의 모습을 대변하는 말이다.
이러한 월스트리트의 분석과 대안은 철저한 정치공학적인 제안이기에, 대립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슬람 지하디스트의 테러를 더욱 합리화시켜주는 것 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화적 충돌은 척결이 아니라 소통이 대안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교차문화 사역(Cross-Cultural Ministry)에 헌신하였던 셔유드 링엔펠터(Sherwood Lingenfelter)와 마빈 메이어스(Marvin Mayers)는 문화적 갈등과 충돌의 대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상황화 모델(Incarnational Contextualization Model)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해 대척점에 서있는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의 문화의 옷을 입고 오셔서 이 땅과 소통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되고, 종이 되고 화목제물이 되어주신 주님의 성육신적 상황화 모델이 구원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소통의 원리였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충돌을 소통으로 구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미워하여 버리시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무력으로 정복하시지도 않으셨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상을 소통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구현이다.
우리가 이슬람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가? 그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 사랑이 있는가? 그들의 우리의 무엇이 되는가?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며, 적대적인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복음을 통한 소통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서방세계가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핵심 가치인 자유, 인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진정한 자유와 인권은 타 문화에 대한 조롱과 정복에 있지 않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200여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의 폐해를 통한 역사적 교훈은 “상대 문화를 척결하고 정복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문화와 복음으로 소통하라!”는 것이다. 성육신적 소통의 원리는 ‘온유와 겸손’으로 시작된다. ‘온유’는 힘이 없고 나약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길들여진 야생마를 의미하는 ‘프라우스’(praus)이다. 솟구치고 거친 힘으로 타 문화를 억압하고 정복하여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낭비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내려놓고, 희생하며 섬기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쏟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결과는 무엇인가? 결국 극단적 이슬람국가(IS)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이제라도 온유와 겸손한 마음으로 교차하는 문화를 이해하고 복음으로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대척점에 서 있는 문화충돌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