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지난 해 11월 11일 밤에 내가 사는 오렌지카운티의 얼바인 한 노천극장에서 다민족연합기도회가 열렸다. 한인들이 절대 다수를 이룬 7천여 성도들이 두 시간 동안 잠깐의 찬양을 부른 외에는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주로 미국의 회복을 위한 기도였다. 자신과 미국의 죄를 회개했고, 미국의 국가 지도자들과 정부, 그리고 교회와 학교와 가정, 그리고 문화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두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표기도자들이 기도제목을 말하고는 ‘주여 삼창’을 외친 후 통성으로 기도하고 다시 대표기도자가 마무리 기도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함께 기도하는 외국인들도 “주여”의 의미를 알고는 다 같이 한국말로 외쳤다. 기도회의 열기를 통해 “소수라도 기도하는 자가 있는 한 어떤 공동체든지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날에 부르짖는 기도에서 미국의 희망을 읽었다. 두 주 전 우리교회는 성령대망산상기도회를 인근의 어떤 기도원에서 가졌다. 나는 특히 부르짖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랬더니 모든 교인들이 힘을 다하여 부르짖었다. 저녁 시간에는 각자 자기의 자녀들을 가슴에 안고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모두에게 주님의 임재가 느껴졌고 그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지고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한 모든 것들이 씻겨 내려감을 체험하였다. 자녀들 역시 부모의 진한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올 한 해 더욱 부르짖는 기도에 열심을 내기로 다짐하였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동인을 찾는다면 무엇보다 기도라 할 수 있다. 특히 부르짖는 기도가 한국교회의 특징이요 강점이다. 짧은 기간 안에 이렇게 괄목상대하게 부흥한 요인 중에서 통성기도를 빼놓으면 말할 것이 없을 정도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한국에 부르짖기에 적합한 기도원이 많이 있었고 그 곳에 가면 으레 비장하게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삼각산 기도원, 우국 기도원, 대한 수도원, 금식 기도원 등등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그들이 금식하며 부르짖는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국과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셨기에 부흥이 임하였다고 믿는다. 나는 기도할 때는 소나무 하나 정도는 뽑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을 만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들으며 성장하였다. 이렇게 부르짖는 교회가 한국교회였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경제 부흥과 함께 부르짖는 기도가 약해졌고 교회도 정체 혹은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꼭 소리를 질러야 하나님이 들으시는가? 하나님이 귀머거리가 아니시지 않는가? 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기도자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부르짖는 기도는 나를 일깨우는 기도요 나의 절실함을 표현하는 기도다. 또한 성경은 매우 강한 어조로, 반복적으로 부르짖으라고 강조한다. 시편에서만 부르짖는다는 표현이 60번이나 언급될 정도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30:2).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77:1).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81:10)는 말씀은 부르짖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어미 제비가 제 새끼들에게 먹이를 줄 때 넓게 입을 연 새끼에게 먼저 준다고 한다. 어미 제비가 보기에 입을 크게 벌리지 않은 새끼는 입 안에 아직 삼키지 않은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르짖음으로 우리에게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 필요함을 알려 드려야 한다.
신약성경에서도 주님은 부르짖음을 통해서 역사하셨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르고 또 질러 응답을 받았다(막10).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조차 불쌍한 과부가 애걸복걸하여 그 청을 들어주었듯이 하나님도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눅18:7)을 풀어주신다고 하셨다. 누구보다 예수님이 부르짖음의 모범을 보이셨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돌 던질 만큼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제자들이 들을 만큼 기도하셨는데 그 기도의 결과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눅22:44) 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하여 기도하셨다.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들은 영적 권세를 회복해야 한다. 교회를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야성이 살아 있는 영권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부르짖는 기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부르짖으면 하나님을 만난다(렘29:12,13). 부르짖으면 영적인 비밀을 깨닫게 된다(렘33:3). 부르짖으면 인생의 풍랑을 잠잠케 한다(막4:38). 부르짖으면 환란을 이긴다(시16:6). 부르짖으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시30:2). 특히 우울증에 노출된 환자는 부르짖어야 한다(시61:2). 부르짖을 때 성령충만과 큰 능력을 받는다(행4:24,31). 부르짖는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