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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로 쓰는 시

백승철 목사 (사모하는교회. 시인. 문학평론가)
백승철 목사

(사모하는교회 담임)

설명 없이 이해되는 언어가 있다. 대게 물질 명사가 거기에 속한다. 예를 들면 마이크, 책상, 양복 따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언어로 분류된다. 그러나 반드시 설명되어야만 이해되는 단어집단은 추상명사 계열이다. 이를테면 온유, 사랑, 믿음, 절제, 소망, 은혜 등은 반드시 설명을 요하는 언어들이다. 그런데 유독 설명으로 이해되는 언어들은 성경 안에 가득 차 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언어들을 눈에 보이도록 해서 확인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당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으러 산 정상에 있었음) 땅 아래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도록 형상화 했다. 우상을 만들어 분명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그 우상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섬겼다.

인간은 눈에 선명히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는 의식이 있다. 한번 상상해 보라. 사랑, 은혜, 소망을 어떤 방식으로 눈에 보이도록 설명할 수 있을까? 의외로 그런 문제는 간단하다. 설명을 요하는 언어들은 행동, 행위로 설명되어야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그 방법을 사용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 사용한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행위로 그 사랑을 설명했다. 그 설명되어진 것이 글로 모아져 성경이 되었다. 확실한 것은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성경은 줄기차게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감동 받는 것은 성경의 단어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 단어들이 행위로 설명되어 질 때이다.

오래 전 일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일본 시인 요시마쓰 고오조오 시인을 초청해 세종문화회관 소회의실에서 '세계작가와의 대화'가 있었다. 필자는 마침 한국 방문 중 그곳에 초청되었다. 그 날 요시마쓰 고오조오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낭송으로 소개한 것이 아니라 행위로 설명했다. 처음 본 광경이라 충격을 받았다. 시어 하나 하나를 행위로 엮어갔다. 얼핏 보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그 후 필자는 '행위로 쓰는 시'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던 기억이 새롭다.

문학에서 행위를 다른 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진실성이다. 진실성이 없어도 얼마든지 위와 같은 단어들을 풀어 쓸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전혀 감동을 줄 수 없다. 크리스천 작가는 행위로 설명되는 글을 써야 한다. 믿음의 태도 역시 마찬 가지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로 설명되는 믿음을 눈으로 확인 시키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믿음의 역동성이라고 부른다. 그 행위의 객관적 자료는 물론 성경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For God is my witness, how my love goes out to you all in the loving mercies of Christ Jesus”(빌1:8).

바울은 사람을 사랑하는 자료가 그리스도 심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감정과 정서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설명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삶의 목표가 더욱 확실해 져야 한다. 행위로 설명되는 신실한 믿음으로 그 일에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지향점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내가 받은 은혜’를 행위로 설명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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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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