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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거울을 보고 미래의 창문을 열라

이동진 목사

(성화장로교회)

역사 속에는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와 미래(未來)의 시간이 모두 담겨있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역사는 오직 과거뿐이다, 현재는 아직 확인해 보아야 하는 시간이고, 미래는 그 시간 자체가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과거로부터 흘러와 현재에 도달했다가 다음 구비로 휘몰아쳐가는 뒷모습을 남겨주며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로 다가올 역사를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과 목적지를 찾아볼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이다. 여러 교단들의 총회가 열리는 계절, 총회 현장은 현실이다. 최근 2년여의 특별한 기간을 제외한다면 총회가 열리는 과거의 모습들은 매년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개회와 폐회예배가 있고, 성찬식도 있고, 회무처리를 위한 시간들 속에서 “법이요!”라는 외침도 있고, 때론 큰소리도 있고, 아마도 어떤 안건이나 선거를 위한 물밑작업들도 있었음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열린 post covid19의 첫 교단 총회가 지난주에 열렸다. 별 다를 바 없는 순서와 진행이었지만 그 속에서 후안 엔리케스 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대적 흐름 속에 현재의 우편함에 미래가 보내온 고소장이 배달되었다’는 화두를 이 시대를 향해 던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후안 앤리케스 교수의 말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어느 날 당신의 책상 위에 고소장이 날아와 있다. 보낸 사람은 미래 세대다, 후손들이 미래의 법정에 당신을 소환해서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할머니는 왜 그때 유전자 편집 기술을 사용하지 않아서 지금의 나에게 이 유전병을 물려주었나요?’, ‘억만장자 2,047명이 전 세계 극빈층의 가난을 일곱 번이나 끝낼 수 있었다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동의합니다”, “재청이요” “가하시면 예하시오” “아니면 아니라....” 이전과 다르지 않은 익숙한 단어들이 들려오는 가운데서 나에게는 이런 질문이 엔리케스 교수의 음성으로 들려왔다. “그때 왜 그런 법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살면 오늘 이 세상이 이 지경이 될 것이라고 왜 좀 더 강력하게 경고해주지 않았어요?” “동성애나 마약의 위험과 불법에 대해 왜 더 진지하고 강하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유한(有限)은 무한(無限)을 연구할 수 없다. 둘러앉은 목사 장로들의 유한한 지식으로 무한의 하나님을 어떻게 연구할 수 있겠는가? 은혜가 무엇인가? 인간의 유한과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체험하는 것이 은혜가 아닌가? 교회는 그래서 종말 지향적이어야 한다. 다시 시작하는 New Noraml의 시대에 교회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다시 한번 심사숙고해야 할 때이다.

반 신앙적 이슈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동부전선 철책 몇 미터가 뚫린 사건도 중요하지만, 동해에서 서해바다까지 이어진 휴전선이 가진 의미와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함께 다루어져야 하듯이 이 세상의 문제는 어떤 이슈 한가지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하다.

과거가 거울이라면 미래는 창문이다. 성경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조명해주면서 종말의 날까지 가야 할 지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고소장에는 반드시 답을 해야 한다. 답하지 않으면 패소(敗訴)한다. 패소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응해야 하고, 확실하고 철저하고 분명하게 대응을 해야 승소(勝訴)할 수 있다. 재판정에 서있는 것과 같은 오늘의 교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승소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성경은 아주 간단한 승리의 원리를 다 알려주었다. 그 원리는 철저한 회개(悔改)와 바른 연결(連結)이다. 그러기 위해 과거라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나서 미래를 향한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성경적 역사관, 그 눈을 열어야 바른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djlee7777@gmail.com

05.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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