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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대법원에서는...

최해근 목사

몽고메리교회 담임목사

지난 5월 2일, 미국의 정치전문 언론매체인 폴리티코에서 현재 대법원에서 심의 중인 낙태와 관련된 판결문 초안이 발표되어 미국 전역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법원에서 어떤 사안을 판결하여 발표할 때까지는 철저한 보안이 생명으로 여겨졌고 지금까지 그 기준은 잘 지켜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최종 결정이 나지 않은 판결문 초안이 언론에 노출됨으로써 대법원의 신뢰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왔습니다.

 

태아의 낙태와 관련된 내용은 미국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아주 기본적인 선으로 이해되며 이번에 노출된 내용에는 낙태와 관련된 근본적인 대법원의 입장 변화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낙태와 관련하여 법률적인 문제를 논할 때 가장 중심적인 논지는 낙태를 여성이 가질 수 있는 헌법에서 규정한 기본권리로 볼 것인지 아니면 각 주(州) 의회가 재정할 수 있는 주법(州法)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입니다. 역사적으로 훑어보면 미국 헌법이 재정된 이후 처음 185년 동안 낙태와 관련된 모든 내용은 각 주(州) 의회가 자체적으로 법률로 재정하여 다루었습니다. 그러다가 1973년 세간에 알려진 ‘Roe v. Wade’ 재판을 통해 대법원은 낙태를 여성이 가질 수 있는 헌법적 권리로 판례를 세우게 됩니다. 이 재판은 개인의 신상보호를 위해 ‘Roe'라는 가명을 가진 여성이 당시 달라스 지역 검사였던 Henry Wade를 대상으로 텍사스 주의 낙태법이 여성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며 대법원에 판결을 의뢰했고 대법원은 Roe의 요구대로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태아 생존 가능기’(fetus viability)를 24주로 보고 그 이전까지는 낙태를 여성이 가질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로 대법원 판사 7:2의 비율로 결정받게 됩니다.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밖에서도 의술의 도움을 받으며 생존할 수 있는 시기, 즉 ‘태아 생존 가능기’가 점차 더 빨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낙태를 할 수 있는 시기가 기존의 24주까지에서 22주 혹은 그 이하로 줄어들게 됩니다. 1992년 대법원은 Casey 사건을 다루면서 태아 생존 가능기가 대략 22주-23주쯤 되는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서는 일부 주(州)에서 ‘태아 생존 가능기’라는 시점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법률이 재정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2018년 미시시피주가 15주 이상된 태아의 낙태를 불법으로 재정했고 이에 반발한 측에서 연방법원에 소송을 하여 승소하자 이에 불복한 미시시피주가 대법원에 상고를 하면서 더 이상 ‘태아 생존 가능기’가 낙태의 합법 혹은 불법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기준은 각 주에서 법률을 재정하는 의회가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즉 낙태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연방헌법이 아닌 각 주 법에서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노출된 대법원 판결문 초안에도 여성들의 기본권으로 간주되어 헌법에 의해 보호를 받았던 ‘낙태권’을 헌법상의 권리가 아닌 각 주(州) 의회에서 법률로 정해야 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주 의회가 태아 생존 가능의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지 아니면 아예 그런 시점 자체에 대한 언급 없이 법률로써 여성의 낙태 가능 여부를 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낙태가 헌법적 기본권에서 벗어나 각 지역 입법기관에서 정할 수 있는 그런 영역으로 바뀜으로써 각 주(州)마다 낙태가 합법 혹은 불법으로 다르게 정해질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고마운 현상 중의 하나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이 줄어들면서 낙태율도 동시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80년도의 15-44세 가임여성 1,000명 중 30건의 낙태가 있었지만 2018년에는 11.3건으로 거의 3분의 1 정도로 줄어든 것입니다.

 

창조주가 원하지 않는 일이고 그 일을 시도했던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 상처와 아픔을 남기게 되는 것이 낙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안타깝고도 무너진 모습을 바라보며 시편 저자가 외쳤던 ‘내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릅니다’는 고백에 동참하게 됩니다. 완전하게 살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깨어지고 망가진 삶을 화려하게 속이기 위해 내 삶은 고치지 않고 바로 있어야 할 기준마저 옮기거나 굽게 만드는  오그라진 자세를 버리고 오히려 무너지고 깨어진 자리에서 눈물과 말씀으로 다시금 그 무너진 자리를 세워가는 건강한 세대가 오기를 기도하며,

 

샬롬.

hankschoi@gmail.com

05.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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