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장로교회)
“컵이 있다. 이 컵은 육체, 컵 속의 물은 마음, 나머지 비어진 부분은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라며 시작한 이야기는 방 안의 공간과 바깥세상의 하늘과 지구 너머 우주로 이어지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인생이라는 존재가 창조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고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강의 중 한 부분이다.
오늘도 인생마당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컵이 예쁘다, 비싸다, 골동품이다. 모던하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목이 말랐고, 누군가 와서 컵에 물과 음료수 등을 채워주자 물을 마신 사람들은 시원한 느낌, 톡 쏘는 느낌, 따뜻한 느낌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컵 얘기와 물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와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때 부모를 따라와 밖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들판으로 언덕으로 몰려다니며 풀을 따서 풀피리도 만들고, 버들강아지로 간지럽히며 까르르 웃어대고, 땀에 젖은 채로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데 시원하게 불어와 땀을 닦아는 솔바람에 미소가 지어진 아이들은 옆에 흐르는 냇가로 달려가 두 손을 움켜서 물을 퍼마시고는 신나게 노래도 불렀다.
밤이 되니까 어른들은 지루해지고 졸음이 몰려와 책상에 엎드리거나 소파에 기대고 어떤 이는 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렸다. 그런데 아이들은 밤이 되어도 신났다. 눈앞에는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낮에 주운 조약돌로 공기놀이를 하거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세어보다가 이름도 붙여주며 마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강연영상을 보다가 해본 상상이다. 현실의 아이들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오늘의 아이들은 이미 뛰어놀지 않는다. 이어령 교수는 컵 이야기에서 영혼의 이야기를 광활하게 펼쳐나가면서 영원한 생명의 이야기로 이끌어 가는데, 어른들은 컵과 음료수 이야기로 정신이 없다. 그러나 영상 속의 강연은 컵의 비어있는 공간이 맞닿은 실내공간이 집밖으로 이어지고, 집밖의 거리가 저 멀리 하늘로 이어지고 그렇게 공간은 우주로 넓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드디어 생명의 근원과 마침내 맞닿은 우주를 넘어서는 영생의 세계를 펼쳐보여 주고 있다.
올해도 부활의 절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절기에 갇혀버린 부활은 사순절기간과 고난주간 그리고 성금요일을 지나 마침내 부활의 새벽예배와 연합축하예배를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 부활이 도무지 놀랍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올해의 종교의식도 정중하게 잘 진행되었을 뿐이다.
‘부활’은 인간이 삶과 죽음이라는 육체의 한계를 넘고 마음과 생각의 우월감도 넘어서 영생에 연결된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진 생명력과 운동력이 있는 단어이다. 절기행사의 악세서리나 배너에 멋지게 쓰여진 글씨문화로 넘어갈 수 없는 우리의 생명인데, 올해도 죽은 언어처럼 지나갔다.
영상 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거지가 깡통과 ‘I’m blind, please help‘라고 쓰인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았고 지나는 사람들은 가끔 동전 한두 개를 던져주었다. 그러다 지나던 한 사람이 거지 앞에 앉더니 그 종이 뒷면에 뭔가를 써서 앞에 놓아주고 갔다. 그러자 갑자기 지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동전과 지폐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뭐라고 써주었기에? 그 종이에 써준 글은 “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
올해도 내년에 또 당연히 돌아올 부활의 절기를 지니고 있다. 늘 반복되어온 인류역사처럼 부활절도 늘 반복되어왔다. 부활은 반복일 수 없는 생명과 능력인데 우리의 부활절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또 내년 부활절을 위해 배너를 차곡차곡 접어두고 있을 뿐이다.
“이 아름다운 날을 나도 보고 싶다”는 강력한 요청의 언어로 바뀐 거지의 종이판처럼 우리의 부활절은 바뀌어야 한다. 애초에 예수부활이 가진 그 진정한 생명력과 운동력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래야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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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