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장로교회)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언론들은 “아주 작은 퍼센트 차이로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다”고 보도했다. “전 국민의 77.1%가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승자는 16,394,815표로 48.56%의 득표율, 패자는 16,147,738표로 47.83%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247,077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며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보도 앞에 3위 이하 다른 후보들의 존재가치는 전혀 드러날 수 없었다.
한 명의 승리자와 한 명의 패배자를 대조시키는 기사들의 갈등구도를 보며 시청률을 올리려 애쓰는 TV드라마의 스토리와 겹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유난히 부정적 성향이 많았던 대선후보들을 세워놓고 ‘저쪽이 더 나쁘니까 안된다’는 논리는 ‘내 쪽은 그래도 낫다’라는 허울 속에 갇힌 민심은 다양한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적나라한 표현들에 둘러싸인 채 총알처럼 비수처럼 날아다니며 끝나지 않은 선거전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선거소식이 전해지는 사이사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탱크부대와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피난민들이 대조되는 화면, 길가의 버려진 시신의 모습들이 눈에 밟힌다. 말과 글이라는 무기로 처절하고 야비하게 싸우는 선거전쟁으로 온 국민이 미움의 강에 빠져버린 시각, 우크라이나 백성들은 실제로 날아드는 포탄 앞에서 죽음의 공포로 몸부림치고 있는 현실을 겪어내고 있다.
물론 누군가는 정치를 해야 하고, 누군가는 경제를 담당해야 하고, 누군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치료해야 하고 그 속에서 교회도 맡겨진 영적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굳이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이 터전을 총알이 박혀 상처가 썩어 들어가고 숨이 끊어지는 실전의 현장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교인들마저 끼어들어 한마디씩 주장하는 이 전쟁터는 죽음보다 미움이 훨씬 더 강렬하게 춤을 추는 것만 같다. 우리가 가슴 벅차도록 만난 복음이 도대체 어떤 복음이었길래 이토록 거친 언어로 공격하고, 감정에 휩싸인 놀림감으로 만들어버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인가. 설교원고도, 신학논문도 그렇게 질서정연(秩序整然)하고 조리(條理)있게 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목사들마저 도무지 논리도, 앞뒤도 맞지 않은 자기감정에 빠진 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인가.
피 흘려 죽는 죽음보다 더 근원적인 영적죽음을 다루는 교회가 참 생명을 놓쳐버리고 미음과 증오의 강을 허우적대는 사이에 처참하게 찢어지는 마음을 쳐다보기라도 하고 있는가. 죽음보다 더 강한 미움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마와 마음까지 굳게 해버린 것처럼 1위 지지자의 이마도 2위 지지자의 마음도 굳어버린 모습을 보며 아프다. 이 ‘가난한 심령’들을 어찌할 것인지 에스겔은 통탄하며 외치고 있다. 오늘 한국사회, 해외 한인사회를 밟고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다 슬프다. 고유가(高油價)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삶의 현실이 슬프고 오고가는 소식들이 슬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기대해야 한다. 그 찬란한 ‘예수 믿기의 기쁨’을 소유하고 죽음을 맞이한 이어령 선생이 남긴 말을 기억하면서. “그 슬픔에 이르기 전에 전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웠어요. 하늘의 별의 위치가 불가사의하게 질서정연하듯 여러분의 마음의 별인 도덕률도 몸 안에서 그렇다는 걸 잊지마세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베드로의 권면을 기억하며 이 시대의 미움을 쫓아내고 형제우애와 사랑을 공급해내는 교회의 역할이 활발하게 움직이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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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