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장로교회)
팬더믹으로 미루어졌던 2020동경올림픽 경기에서도 국가별 메달집계순위와 메달수상자들의 사연들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올림픽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도 점수나 서열이 매겨진다. 심지어 언제부턴가 교회도 대형, 중형, 소형으로 또는 장로 권사 안수집사와 같은 직분이 서열화되기 시작했다.
지난 주 한국의 교계뉴스에 ‘빅데이터를 통해 본 언택트 사회의 설교선호도 분석’이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근거한 기사가 올라왔다. 이 기사는 도표와 함께 ‘설교선호도에 따른 100위권 설교자’라든가, 어느 목사의 설교가 100위권 영상에 몇 개가 랭크되어 있다는 등의 서열매김 표현으로 관련내용을 소개했다. 물론 논문의 연구로 나타난 통계를 말하고 있지만 이를 대하는 독자(교인)들은 아마도 ‘방송3사 시청률 비교’라든가‘가요톱10’ 또는 ‘대권주자들의 지지율’을 보는 것같은 마음으로 그 기사를 대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박해와 핍박의 기간은 기독교의 새로운 변화와 성숙을 이끌어내는 요소로 작용했다. 팬더믹이 주는 부정적인 영향도 없지않지만 역사는 이 또한 긍정적 변화와 성숙을 이끈 시간이었다고 후세에 전해줄 것이다. 팬더믹의 영향이 지역교회들의 실제적 운영은 물론 교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변화를 가져오는 스나미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온라인예배를 비롯해 그야말로 변화되는 상황들을 따라가기조차 힘겨운 것이 사실이다. 그 속에서 교회는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는 팬더믹 이전부터 이미 급속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로 인한 변화들은 ‘미래시대’가 가져올 변화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할 정도이다. 이 시대에 계속해서 던져지는 새로운 단어들을 따라가기에도 숨이 찰 정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버스라고 하면 시내버스, 관광버스 정도를 떠올리는 수준에 머물러있는데 메타버스(Metaverse, 1992년에 처음 사용된 meta와 universe의 합성어)라는 말은 도대체 어느 우주에서 사용하는 말인가 하고 있는데, 이미 메타버스는 가상공간과 현실세계와가 만나는 현실 속에 깊숙이 들어와있다.
얼마 전 아이들이 구입한 VR게임을 해보았다. 잠수경같이 큰 안경을 끼고 양 손에 리모콘을 끼고 눈앞에 펼쳐지는 야구장의 타석에 선 나를 환호하는 관중들의 함성이 입체적으로 들려오고, 배트를 들고 타석에 선 나는 진짜 야구선수가 된 것 같은 착각 속에 한동안 신나게 두 팔을 휘두르며 놀았다. 그런데, 게임을 마치고 보니, 함성과 수 만명 관중들은 어디 가고 나는 거실 한가운데서 혼자 춤추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현실은 어디인지 잠시 생각이 흔들리는 현상을 맛보았다. 우리는 아직 인공지능(AI)이라는 단어에서 겨우 전기밥솥이나 로봇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있는데, 현실은 이미 미래의 세계를 우리 눈앞에 끌고와있다. 이미 커다란 잠수안경같은 현재의 VR기기를 일반 안경 크기로 줄이는 기술, 가상세계 경험을 오감(五感)으로 느낄 수 있는 기술, 뇌의 생각만으로 아바타를 움직일 수 있는 기술까지 선보이면서, 의학에서는 이미 시각, 청각장애인들이나 팔다리 절단환자들이 정상인과 똑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의학에 접목시킨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미래의 변화는 이미 이렇게 현실 속에 들어와있다.
이 급속하고 엄청난 변화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의 추상적인 단어들을 어떻게 현실신앙 속에서 붙잡을 것인가? 아직도 참석숫자나 동영상 조회 숫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어느날 주님이 재림해오실 때 그 놀라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학은 신앙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과학 속에서도 침착하게 걸어가야할 신앙의 길을 놓치지말아야 할 것이다. 변치않는 믿음이 여전히 필요하다.
급속한 변화가 가져올 미래가 주는 막연한 두려움 앞에서도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전능자의 사랑하심을 믿는다면 미래가 어떠한 환경과 상황으로 다가온다 해도 교회는 결코 두렵지않은 날로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올림픽 근본정신이 메달이 아니라 참가에 있다는 것을 아는 선수들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자신의 그 경기장에 서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다. 신앙생활 또한 결코 숫자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참가함에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확신할 때 교회는 여전히 흔들리지않고 서있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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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