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장로교회)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만남에 있다. 혼자만의 사색이나 묵상을 통해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타 종교의 신앙과는 다르게 기독교신앙은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낸 유일한 신앙대상이신 분과 만나는 지점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만남의 지점은 사람의 ‘마음문’ 앞인데 그 분은 언제나 먼저 문 앞에 와계시고, 그 문을 열어줄 때 만남을 시작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만남의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왔다. 조선시대 양반집 문 앞에서 소리치는 ‘이리 오너라’부터 시작해 펜으로 정성들여 쓴 마음을 전달하는 펜팔시대와 유선전화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아날로그방법이 사라지고, 그야말로 똑똑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온라인을 통한 ‘접속시대’가 되었다. 즉, 땀을 흘리며 걸어가서 만나든지, 아름다운 글씨체로 편지를 쓰기 위해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정성과 노력이 필요했었는데, 지금은 손가락 한 번의 터치로 만남이 이루어지는 접속시대에 접어들었다. 직접 손을 잡고 마음을 나누는 접촉의 시대를 비웃으며 등장한 접속시대에 들어서자 하다못해 툭툭 하나씩 돌리던 텔레비전의 채널도 터치 한번이나 음성인식으로 쉽게 다른 채널과의 만남을 열어주게 되었다.
태초에 에덴동산의 첫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마도 하늘을 바라다보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당신을 바라보기만 하면 창조주이신 그 분은 어느 때든 순간처럼 첫 사람 앞에 와서 대화에 응하셨고 첫 사람 아담은 마음의 생각만으로도 그 분과의 접촉이 이루어졌었다....고 해도 지나친 상상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 분과 첫 인간의 만남은 편안하고 수월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죄가 들어오더니 그 분과 사람 사이에는 도무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되었다. 죄는 때로는 사슬이 되고, 때로는 두려움이 되어 가로막았고 둘 사이에는 다양한 장애물이 설치되어 만남을 방해하고 있다.
원래 인간이 그 분,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인격적이며 피지컬적인 실제 접촉(接觸)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죄가 그 접촉을 방해했고, 화질과 음질이 떨어지고 전자파 방해로 연결이 끊어지는 불안정한 만남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이 시대는 virtual, 가상의 만남시대가 되었다. 온라인을 통해 만남이 이루어지는 접속시대가 되었다.
접촉이 실제적 만남이라면 접속은 가상의 만남이다. 접속은 기계적 만남이라면 접속은 실제적 만남이다. 동부 버지니아비치에 사는 15개월 된 손녀딸과 하루에 한번은 영상통화를 하는데 화면을 통해서지만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이 만남의 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러다가 두 주 전, 시간을 내어 버지니아 비치를 방문해 손녀딸과 직접 만나 일주일을 함께 지냈다. 온라인 ‘접속’으로 만나다가 품에 안고 볼을 비비는 신체적 ‘접촉’의 만남은 순간순간이 얼마나 따뜻한 감동이었는지... ‘닿다’, ‘감동하다’ 같은 뜻을 갖고 있는 한자어 촉(觸)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한 일주일이었다.
LA로 돌아와 다시 영상접촉으로 손녀를 만나면서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 화면에 뽀뽀하러 오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보이는데 만져지지 않는 만남을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서럽고 안타까운 울음이 며칠을 가는 것이었다. 아이는 접속되어 나타난 영상이 아니라 품에 안기던 접촉이 느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4장의 우물가, 그 뜨거운 정오의 햇볕 아래 물 길러 나온 여인에게 그 분이 말을 걸었다. 물 좀 달라고. 왜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느냐고 뜨악한 반응을 보이는 여인에게 그 분은 대화의 물꼬를 터나갔다. 물 좀 달라는 요청으로 시작한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분은 역사 속 야곱의 우물이야기를 지나 여인의 개인 가정사를 건드렸고 마침내 영성의 만남인 예배이야기로 대화를 이끌어가셨다. 그 분은 어딘가에 접속하는 방법이 아니라 직접 여인과의 접촉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분과의 전인적(全人的) 접촉인 예배를 가르쳐주시고, 나아가 이 여인으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접촉해야 할 메시아가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역할을 신나게 감당하게 하셨다.
접속의 시대이다. 나만 아는 비밀번호를 입력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가상공간 속에서 관계가 맺어지는 시대이다. 이메일을 비롯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톡 등 접촉의 방법과 효능이 더욱 발전해가고 있는 가운데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시대는 생명의 만남이어야할 예배조차 접속을 통해서 진행되도록 만들었다.
기독교신앙은 접속이 아니라 접촉으로 시작되었다. 실제적이고 전인적인 접촉이 이루어는 희열이 복음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죄로 인해 단절된 그 분과의 연결은 사람으로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분의 구원계획의 실행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졌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그 분이 결정한 방법은 ‘인격적 만남’이라는 방법이었다. 독단적 결정이나 기계적 자동화를 통해 접속되는 만남이 아니라, ‘그 사람’과 직접 접촉하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그 방법이 성육신(incarnation)이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는 방법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그 분의 방법은 결정의지를 인간에게 제공하신 인격적 방법이었던 것이다.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들과 드디어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접촉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었다.
온라인 접속의 시대이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와 직접 만나기 원하신다. 접촉의 시대로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접속의 주파수가 흔들리고 있다. 접속 상태가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다. 그 분과의 실제 접촉점을 향해 나아갈 때이다. 그 분의 음성에 귀가 열리고, 그 분의 눈빛에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그 분의 터치에 온몸이 따스해지는 놀라운 접촉의 은혜, 그 은혜의 강으로 들어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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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