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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이동진 목사

(성화장로교회)

사실 처음엔 이렇게 무서운 결과가 나타날지,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고 맞이한 것이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였다. 물론 그 영향력이 이 정도까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아무리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들어도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지내왔는데 최근에 들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이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고 있지만, 이미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의 마음은 알지 못할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가까운 사람들 중에 사망소식들이 들려오면서 사람들은 더욱 움츠러들고 분노와 포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희망의 동물이어서인지 이러다 언젠가는 잠잠해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붙잡고 지내고 있는 것 같다.

팬더믹(pandemic)은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염병을 뜻하는 말이다. 코로나19 초기만 해도 WHO(세계보건기구)는 팬더믹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주저했었다.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무방비적으로 퍼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팬더믹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1년 전 작년 2월이었다. 그러나 그 발표 후 채 한 달이 안 되어서 114개국에서 11만 여명의 학진자가 발생하는 등 급속한 증가추세에 WHO는 팬더믹을 선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1년을 지나면서 막연한 공포가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왔다. 뭔가 이상한 느낌의 두려움이 인류사회를 어둡게 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 한국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 87%가 자신이나 가족이 코로나19에 감염될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발표했다(주요국 전체 평균은 67%).

그런데, 요즘 가장 자주 등장하는 글 제목을 볼 수 있다. 바로 ‘코로나보다 더 두려운 OOO’라는 제목이다. 이런 표현이 다양한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코로나보다 두려운 건 예술이 잊혀지는 것’, ‘코로나보다 더 두려운 건 배고픔’, ‘코로나보다 두려운 건 자연재해’ 등 어느 분야에 관한 글을 쓸 때 사용되는 예문이 되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연말에 발표된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20 보고서’에는 아예 이 문장이 설문지의 질문내용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한국 사람이 코로나19 자체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몇 가지가 두드러졌는데 ‘확진 판정을 받아 감염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것’이라는 대답이 무려 68%였다. 10명 중 거의 7명이 실제 확진판정을 받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확진자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즉,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말에서 ‘이것’은 코로나19이고 ‘더 무서운 것’은 코로나19에 걸렸다는 소문이라는 것이다. 실체보다 외부의 시선을 더 무서워한다는 말을 통해 그동안 우리 기독교신앙을 들여다보자. 바로 이 모습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가? 본질보다 외형중심의 기독교신앙.

팬더믹 기간을 지내면서 당연히 생각해온 예배의 자리를 뺏기고 영상화면 앞에 앉아있는 모습. 이전처럼 교회갈 수 없다, 이전처럼 예배할 수 없게 된 현실은 사실 두려움이 아니라 슬픔이다. 이 슬픔을 두려움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익숙하던 것을 잃어버린 아쉬움과 슬픔이 우리의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말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호세아 선지자가 이미 대답을 알려주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바이러스보다 내 몸에 바이러스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게 더 두렵다는 대답 앞에서 교회는 본질보다 외형적 신앙생활을 더 중시해온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는가를 짚어보아야 한다. 1년 동안 교회 앞에 펼쳐진 이상한(?) 현상들과 정부의 정책들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지금이라도 정말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병은 일단 인정하고, 알리라고 했다. 교회는 어디가 병들었는지, 내 신앙은 어디가 병들었는지를 어서 찾아야 한다. 더 이상 어떤 방법에서, 이론에서 대안 찾기를 내려놓고 기독교진리의 본질 앞에 서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생명과 직결된 것인데, 언젠가는 내려놓아야할 육체문제에 매달려온 신앙을 점검하고, 육체를 넘어 영생의 문제를 분명하게 찾아가는 본질적 교회의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의 이야기야말로 교회가 진정 두려워해야할 질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야 한다. 원색복음은 유치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것이다.

인간의 지혜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위기극복의 수준을 넘어 영생의 문제 앞에 나가야 진정한 지혜이다. 성경이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가르쳐주었다면 지금 교회가 진정 무서워해야할 문제는 무엇인지, 교회는 어디에 서 있어야할지 그 대답은 이미 밝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djlee7777@gmail.com

0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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