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드림포럼 대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시 제사장들, 서기관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미 700년 전에 미가의 예언을 통하여 메시아가 태어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미가5:2). 또한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왕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지 않았을까요? 걸어서 가면 3시간, 노새를 타면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불과 6마일뿐이 안되는데도 말입니다. ‘관심이 없어서’입니다. 입으로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목자가 될 것이다”라고 떠들었지만 진작 이들은 ‘메시아의 탄생’에 별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현재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 밭 사고, 소 사고, 집 사고, 돈 버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로서 살았을지는 몰라도,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기들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아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베들레헴으로 갈 생각조차 안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산 넘고 강 건너 메시아를 만나고자 4개월이 걸려 밤을 지새며 왔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어디 그들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우리들의 모습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매해마다 반복되어 찾아오는 성탄절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나의 구원자, 나를 구원해줄 메시아”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주식이 올라가고, 환율이 떨어지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향력 있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맥을 넓혀 가느냐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파티에 관심이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알긴 하지만 진정 ‘예수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나의 메시아’, ‘나의 구원자’, ‘나의 예수‘는 안계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종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나에게 예수는 누구신가?’ 그리고 ‘내가 예수를 영접할 때 나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예수는 누구십니까? 이 물음에 예수전도단을 통하여 이 땅에 많은 젊은 생명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고 헌신케 하신 김정준 목사님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에게 예수는 백문일답입니다. 백문, 나에게 백가지를 물어봐도 일답, 대답은 오직 하나 예수뿐입니다”라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이 죄에 매인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를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소생시키시려고 6마일 거리에 오셨는데 당시 그 6마일을 걷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오늘도 그 6마일을 걷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에, 사랑에, 위로에, 영생에 이르기까지, 예수께 이르기까지 6마일, 이제 우리는 강림절을 맞아 1마일씩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별을 따라 걸어가면 됩니다. 이 걸음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 통해 함께 나눕니다.
꿈속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말틴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오늘 찾아오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차와, 수프, 따뜻한 불을 준비하고 하루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왜 안오셨습니까?” 그러자 어둠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그리고 사과를 훔친 소년과 노파가 나타나 말틴에게 미소를 지었고, 이어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말틴, 오늘 네가 나를 진정 보지 못했느냐? 난 오늘 너를 세 번이나 찾아가 만났었다.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이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우리가 베들레헴까지 6마일을 걸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보며 사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형제 중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극진히 대접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마25:40)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이런 ‘선한 사마리안의 마인드와 스피릿’ 그리고 선행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와 만나는 ‘나의 성탄절’을 살게 됩니다. 강림절기, 예수께로 6마일입니다.
12/0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