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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야기를 해야 하는 계절

이동진 목사

(성화장로교회)

계절은 가을로 들어섰다. 빠르면서도 아주 느리게 지나가는 한 해를 되짚어보니 인류가 살아온 그 어떤 해와 다름이 없는 이야기들이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힘이 말하는 시대도 있었고, 지성이 말하는 시대도 있었다. 불의가 다스리는 시대도 있었고, 의로운 사람이 존경받는 시대도 있었다. 전쟁과 질병의 두려움으로 덮인 역사 속에서 가끔은 회복의 기쁨을 맛보는 시대도 있었다.

인류의 시대는 태초부터 죽음의 이야기가 끌고 온 역사로 채워졌다. 그러나 가난한 자든 부자이든, 병든 자이든 건강한 자이든 또는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 중의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사람의 이야기는 결국 죽음의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역사 속의 어느 인물도 죽음의 마무리 후에 생명을 보여준 사람은 없었다.

핵탄두 미사일이나 기근과 자연재해 소식도 그렇지만 올 한 해 동안 전 인류의 삶을 흔들어대고 있는 코로나도 결국 죽음의 이야기이니 오늘 우리만 이상한 시대를 만난 건 아닌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던 인류역사 속에서 의학이나 과학을 통해 소망을 찾아내 죽음을 이겨내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때로는 가슴을 적시며 살아가는 시인들이 나타나 낙엽 지는 죽음의 이야기 속에서 겨울지나 다시 보는 생명의 이야기를 통해 소망의 줄을 던져주곤 했다.

한 시인의 작품을 열어본다. 시인(詩人)을 불러오는 시론(時論)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시론글 속에 시인 한 사람을 불러온다. 장미를 노래하다 장미가시에 찔려 세상을 떠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가 묻혀있는 라몽의 언덕 위 교회마당의 비문에는 그의 장미시가 새겨져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토록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 조각가 로댕, 철학자 니체와 동시대를 살면서 “예술가에게는 깊은 외로움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던 릴케는 그 외로움 속에서 죽음을 생각게 하는 글을 써내려가곤 했지만 그가 마음으로 부르짖고 싶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었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이렇게 첫 줄을 썼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몰려드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곳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어서 다양한 죽음을 써내려가는 릴케는 “옛날에 사람들은 과일에 씨가 들어있듯이, 사람도 내부에 죽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며 죽음을 파고든다. 그러나 이처럼 생명의 잉태에서도 죽음을 보고, 병원도 죽음의 공장으로, 일상의 사물 속에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짚어내고 있는 28살 말테의 눈을 통해 릴케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릴케는 ‘죽음은 결국 부활을 위한 전주곡’이었다 라든가, ‘죽음은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첫걸음’이라는 일말의 설명도 덧붙여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도서처럼 마지막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면 생명을 얻는다”는 소망의 대전환점을 붙여놓지도 않았다. 도무지 답이 가려져있어 답답한 시험문제지를 보는 것 같은 “말테의 수기”는 이렇게 끝난 것일까? 아니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죽음을 통해 삶을, 어두움을 통해 빛을 보게 해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기에는 꽤 많은 집중력이 필요한 작품이다. 릴케는 다양한 죽음이야기들 속에 중간 중간 생명줄 같은 문장들을 던져놓음으로써 결국 그가 말하고자하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의 갈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과 적막 속에서 나는 스스로 기력을 되찾고 자신을 조금 사랑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내가 찬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나를 굳세게 해다오. 나를 지탱할 수 있게 해다오./ 꽃과 열매는 익고 나서야 땅에 떨어진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 릴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에 대한 원초적 생명의 그리움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말테의 수기”처럼 구약 전도서도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전도서는 성경으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계절이 바뀌면서 나무로부터 떨어지는 낙엽이 주검처럼 쌓여가기 시작하는 이 시월에, 릴케문학의 애둘러 짚어보는 생명에 대한 접근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삭막하고 허허로운 정지화면 같은 올 한해를 살아온 인생들을 향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생명의 문제는 직접 돌파해나가는 성경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일일 것이다. 전도서의 생명메시지를 다시 되새겨본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그렇다. 하나님, 그 분은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올해처럼 혼란한 시대 속에 여전히 죽음이야기가 덮여올지라도 우리는 꽃피우는 생명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아야만 할 것이다. 그 길이 살 길이기에....

10.1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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