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장로교회)
사회심리학자인 마크 리어리(Mark Leary) 듀크대학 교수가 만든 소시오미터(Sociometer)라는 말은 “순간순간 자신의 모습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에 관한 내면의 수치(數値)”를 일컫는 말이다. 즉, 내가 나의 자존감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바람직한 동업자로 생각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통계를 기준으로 자신의 수용 및 소외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와 같은 것은 것을 뜻한다. 특히 요즘처럼 대면(對面)만남보다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공간에서의 만남에서 소시오미터는 사회적 관계의 새로운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내가 올린 게시물 자체의 질(質)이나 의견의 중요성보다는 이 게시물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 즉 얼마나 ‘좋아요’를 눌러주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에게 친구요청을 하고 팔로워가 되어주는지를 통해 나의 내면수치(內面數値)를 가늠하게 되었고, 오히려 대면만남보다 더 자아중심적 사고에 갇히게 되지 않나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내 마음 속의 나를 꺼내볼 수 있는 소시오미터가 나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좋겠지만 기계(?) 속에서 기계를 통해 만나는 인간의 관계는 이미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신 인격적 관계에서 멀리 떠나있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외로운 새장에 갇힌 새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예배, 성도의 교제라는 단어들이 그동안 공통적으로 이해되어온 묵시적 뜻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요구하고 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공동체라는 한 울타리의식을 체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지극히 당연한 찬양대의 합창은 멈추게 되었고, 우주인들처럼 여전히 불편한 마스크나 가림막을 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해야하는 모습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못하게 하고 있는가 하면, 예배 후 성도의 식사교제(만찬)은 물론 거룩한 성찬조차도 방향을 못 잡고 표류하고 있다. 하나 됨을 가르쳐온 공동체신앙이 이젠 하나 되면 안 되는 현실 앞에서 갈 바를 못 찾아 헤매고 있는 현실이다.
오늘 교회의 소시오미터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예배, 물론 혼자서도 드려야하고 드릴 수 있는 것이 예배이지만 그동안 함께 모여 드려온 회중예배를 통해 알게 모르게 배어있는 신앙동지의식에서 떨어져 나와 자그마한 스마트폰 앞에 앉아있는 우리의 소시오미터 수치는 아마도 상당히 낮은 숫자에 머물러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예배와 성찬 이 두 은혜의 방편 중 하나인 성찬을 나누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너무나 큰 영적 허전함과 상실감을 안겨주고 있다. 영상으로 성찬을 인도하는 방법을 시도하는 교회도 있지만 아무래도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주님이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가르쳐주신 성찬을 화면을 통해 나누기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일상의 성찬이 되어야할 성도의 교제 또한 사라졌다. 한 식탁에 둘러앉아 나누던 지혜와 행복의 식탁을 그리워하지만 언제 다시 식탁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을지 요원할 뿐이다.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백신을 개발하면 된다고 했지만 한쪽에서는 이미 한번 감염되었던 사람이 다시 2차, 3차 감염이 된 경우도 속속 나타나고 있으니 이만큼에서 인간은 항복의 손을 들어야할 것만 같다. 그러면 이 시대에 이미 들어와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구도 한계가 있고, 찾아내는 방법도 해결책이 못한다면 우린 그냥 바이러스에게 항복의 손을 들어야만 하는 것인가, 이러한 인류의 허둥대는 멸망의 모습 앞에서 ‘나에게 절하라’는 사탄의 오만함 앞에 무릎을 꿇어야할 것인가?
이젠 정말로 우리가 돌아와야 한다. 이젠 정말 길이 없다. 내일 날이 밝으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밤, 돼지우리 안의 둘째 아들이 생각난다. 아직 현실은 어두운 밤, 주변은 돼지똥냄새, 온통 더러운 오물구덩이인 그 우리 속이었지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둘째 아들의 마음은 이미 현실의 담을 뛰어넘어 고향집으로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그리도 중요했던 인간들의 세상살이처럼 살아온 나의 소시어미터를 우주적 공간, 아니 영원한 세계 속에서의 소시오미터로 측량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인 것 같다.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성경 읽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지금까지 내 인생의 척도가 되어온 소시오미터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소시오미터의 측량눈금을 바꾸면 된다. ‘남이 보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는 나’를 회복하면 된다.
측량눈금은 캐논(cannon, 기준)이다. 그 사회생활의 기준으로 사람들과 더불어 예의 있게, 배려하며 살아왔고, 그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모범적이고 세상과 구별한 교회생활을 해오지 않았는가? 다름을 나누어 선을 긋는 구별은 진정한 거룩이 아니다. 성별(聖別, 거룩한 구별)이어야 거룩이다. 그리고 그 성결한 거룩이 우리가 새롭게 세워야할 캐논(측량눈금)이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세상적이었던가? 방법도, 교훈도, 배움도, 나눔도 심지어 서로간의 교제도 얼마나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만들어왔는가? 그동안 우리 교회의 소시어미터 눈금이 잘못 그려졌던 것이다. 이제, 정확하고 졍교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우리 삶의 바로미터, 소시어미터로 삼을 때 우리에겐 새로운 소망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탕자의 그 밤은 얼마나 길었을까. 자고 깨면 1시, 또다시 눈붙이고 뒤척이다 깨보아도 2시... 언제 동이 터올 것인가 기다리던 탕자의 아침이 밝아오면서 마침내 해가 떠오를 때 탕자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떠는 마음을 다지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밤새 하나님과 샅바를 잡고 씨름하던 야곱이 맞이한 아침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밤새워 샅바를 잡고 씨름한 그 인내와 끈기에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그래 네가 이겼다(고 해줄게)”라는 응답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의 밤은 얼마나 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크로노스를 넘어 카이로스라는 영원을 가르쳐주고 있다. 교회들이여 힘을, 기도와 말씀의 힘을 공급받자. 그것이 살 길이다.
07.2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