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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피트 사이에 새 삶이 있다.

이동진 목사

(성화장로교회)

길어지고 있다. 언제까지일지도 예측하기가 어렵다. 바뀌고 있는 게 분명한데 희미하다. 지금 우리가 들어와있는 이 시대가 그렇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짐작할 수 없지만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과 모습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B.C(before Christ)/A.D(Anno Domini)로 나누던 인류역사가 이제부터는 BC(before corona19)/AC(after corona19)로 구분될 뿐 아니라 생활을 위한 금전거래가 현금결제(cash)에서 카드결제(digital currency)로 바뀌는 ‘C에서 D로’ 등 모든 분야에 신속한 변화가 올 것이 예고되고 있다. 이와 같은 미래의 변화에 대해 한국의 이광형 교수(KAIST석좌교수)는 STEPPER라는 단어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빛을 프리즘으로 분석해보듯이 보이지 않는 미래세계를 사회(S), 기술(T), 환경(E), 사람(P), 정치(P), 경제(E), 자원(R)의 일곱 요소로 세밀하게 나누어 분석해보아야 할 것을 제시했다.

이중에서도 가장 우리를 당황시키고 있는 것은 사람 사이 관계의 변화라고 이 교수가 짚었듯이 이젠 6피트(feet)를 떨어져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한 신문만화는 유리로 막혀있는 개인 식탁이 놓여진 미래의 식당모습을 제시해놓았는데 SNS에는 이미 1963년 유럽의 한 신문이 이런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 듯 지금 개발되는 1인용 차량과 거의 흡사한 모양의 자동차들이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을 소환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경제 재개를 위해 그동안의 행정지침을 완화하는 지역도 있지만, LA는 불편함의 시간을 더 연장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현실적 어려움은 더 지속되게 되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불편은 참아야 하고 함께 협력해야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불안하다. 개인도 불안하고, 가정들도 불안하다. 개인 비즈니스는 물론 웬만한 회사들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다.

교회에도 여러 생각과 방법들이 제시되고 시행해보지만 교회도 사실 두렵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조건 믿음’으로 조용히 순종하고 있는 것 같은 우리의 모습 속에 스며있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하나님을 믿으라, 세상 주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분의 손이 일하시고 있다”고 강하게 선포하고 주입시키는 방법. 그러나 아무리 설교를 통해 그렇게 말씀을 외친다 해도 짙게 드리운 코로나블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시론을 통해 무슨 해법을 .제시해야할지, 부흥사처럼 강경한 문장으로 이러한 때 우리의 믿음을 보이자고 선동해야할까. 괜찮아질 거라는 미사여구로 보듬어주어야 할까.

그러나 기존 언론매체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인류와 역사 앞에 문제가 생기고, 당장 민초들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들을 좌절에서 이끌어낸 적도 없고 불같은 사명으로 생명력 있는 메시지를 통해 시대를 이끌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설 하나 제대로 쓰는 신문사나 청중의 가슴을 울리는 칼럼도 없는 방송 등 교계언론이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만한 리더십은커녕 이민교회의 상황을 제대로 분별할 능력도 갖추지 못해왔던 것을 감출 수 없다. 결국 6피트가 아니라 기독언론은 교회로부터, 성도들로부터 60피트, 아니 전혀 다른 방향으로 멀리 떨어져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은 지금 교계언론에 대한 자성만은 아니다. 미주크리스천신문만이겠는가? 난립해있는 기독언론들 만이겠는가?  이 자성의 고백은 우리네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고, 기독교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기독교인인 우리, 특히 목사, 장로 등 교회리더십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자 자성의 고백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에 내려지는 정부와 관련부처의 대응과 해결책을 보면서 그래도 이 상황과 미래를 바르게 다시 세울 수 있는 길은 교회가 감당해야한다는 무언의 책임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6피트로 규정한 지침은 거리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정한 것이며. 이 social distancing은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자. COVIC19가 제시하고 있는 이 거리두기는 결국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지침이 아니라, 내가 너를, 우리가 서로 더욱 존중함으로 보호하는 마음과 하나 된 운명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장치임을 깨닫게 해주는 지침이라고 받아들이자.

한국에서는 행동지침이 완화된 후 이태원의 한 클럽을 통해 한데 뒤엉킨 젊은이들의 물리적 가까움이 결국 다시 아픔 속으로 사람을 끌고 들어갔다. 클럽사건을 통한 확진자 증가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얼마나 생명과 관계있는 일인지 다시 확인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젠 정말 어울려 흥청대는 놀이문화에서 거리를 두고 앉아 난을 치는 선비들의 놀이 같은 품격과 예의를 회복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근접시각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해주면서 우리가 놓친 많은 것을 다시 찾게 해주리라 기대한다.

교회당 예배를 잠시 멈추고 흩어진 자리에서 드리는 ‘자가격리 예배’는 우리의 예배를 진정한 축복의 자리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 불편함 속에서 서로사랑의 마음을 찾아내고, 답답함 속에서도 하나되어 사는 마음을 더 배우는 축복의 시간을 열어나가야 한다.

사람의 생각은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데, 여전히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펼치고 위로를 얻으며 새로운 소망을 기대하고 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05.2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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